이번 대국은 일본 정보통신업체 드왕고(Dwango)가 주최한 이벤트 대회로 3전 2선승제 가운데 제 2국이었습니다. 그제(19일) 열린 제 1국에서는 조치훈 9단이 223수(대국시간 3시간 반)만에 불계승을 거뒀습니다. 이로서 양측은 1대 1을 기록한 겁니다. 마지막 제 3국은 오는 23일 수요일 개최됩니다.
조치훈 9단은 아시는 것처럼 한국인입니다. 6살의 어린나이에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났죠. 이후 일본 역대 최다 우승 기록(74회)을 세운 분입니다. 지난 6월 일본 바둑 사상 두 번째로 일본 기원이 인정하는 '명예 명인'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9월에는 일본 아함동산배 속기오픈전에서 준우승을 했습니다. 올해 60살이기는 하지만, 한물간 기사가 아니라 지금도 꾸준히 실력을 보여주는 현역 기사인 겁니다. 조치훈 9단의 랭킹은 일본 기원 공식 11위입니다. 아래 사진은 제 1국을 승리한 뒤 웃고 있는 조 9단의 모습입니다. 어제는 볼 수가 없었죠.
딥젠고는 일본의 바둑 프로그램 '젠(Zen)'를 업그레이드한 프로그램입니다. '젠'은 지난 3월 세계 바둑 프로그램 대회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바둑 프로그램끼리만 대결하는 대회였는데, 알파고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젠의 기력은 7단 정도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승 직후 IT업체 드완고가 나섰습니다. 개발자인 가토 히데시 씨에게 "젠을 구글의 알파고 같은 고성능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업그레이드시키자"고 제안한 겁니다. 이후 드완고의 개발자들과 도쿄대 연구팀이 붙어 '젠'의 인공지능 성능을 급성장 시켰습니다. 이름도 '딥젠고'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지난 7월 러시아에서 다시 프로기사와 맞붙었습니다. 상대는 세계 최고의 여류기사인 조혜연 9단(Go Ratings 274위)이었습니다. 여기서 딥젠고는 2점 접바둑(2점을 먼저 둠)으로 1.5집 차 승리를 기록합니다. 고성능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한 지 4개월 만에 접바둑으로 세계 최고수에게 승리를 거둔 겁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3개월이 지나 일본 바둑계의 전설인 조치훈 9단을 꺾은 겁니다. 그것도 호선으로 말이죠. 성장 속도가 엄청 나죠.
이번 대국은 드완고가 운영하는 일본 동영상사이트 '니코니코'가 생중계를 했습니다. 딥젠고는 조 9단과 경기를 벌이면서 실시간으로 스스로 자신의 승리 확률을 계산합니다. 아래는 대국 도중 니코니코 화면입니다. 왼쪽 딥젠고(백)가 승률 52%, 오른쪽 조 9단(흑)은 48%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딥젠고 개발팀은 구글의 알파고와는 다소 다른 방식의 인공지능을 적용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바둑 프로그램인 '젠'의 특성을 유지해 속기에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는 분석입니다. 인공지능은 최적의 수를 내놓기 위해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3월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대국 당시엔 양측에 2시간씩이 주어졌습니다. 1분 초읽기는 3회가 주어졌습니다. 시간이 많을수록 인공지능이 더 유리합니다. 딥젠고와 조치훈 9단과의 대결에서도 규칙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래 제 1국 당시 사진을 보면, 오른쪽 조 9단은 2시간을 모두 썼지만, 딥젠고는 54분이나 남았습니다. 상당히 속기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딥젠고와 조혜연 9단의 대국은 제한 시간 20분의 초속기였습니다. 조 9단은 "인공지능은 계산 시간이 필요한데, 이런 속기 대국을 제안한 것은 뭔가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딥젠고를 알파고와 비교하면서 이번 대국을 일본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정도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조치훈 9단의 Go Ratings 랭킹이 160위 권이라는 점도 고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승부가 1대 1이 되면서 많은 언론들이 다음 주 수요일(23일) 열리는 최종 제 3국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국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알파고 이후 엄청 떠들었던 국내 인공지능 이야기는 다 어떻게 됐지? 2025년까지 알파고보다 130배 빠른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겠다는 정부 계획도 있었잖아?" 그런데, 8개월이 지나 요즘 기사를 찾아보니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인공지능 '엑소브레인'이 EBS 장학퀴즈에 나가 우승했다는 소식 정도가 있군요.
그 사이 일본에선 1) 일본 제약 및 IT업체 50개사 인공지능으로 공동신약 개발 2) 일본 야후 인공지능 자산운영서비스 개시 3) 나고야 지방신문 인공지능 작성 기사 도입 4) NEC 입사서류 심사에 인공지능 활용 추진 등 관련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알파고에 진 것은 이세돌 9단인데,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더 큰 충격을 받은 느낌입니다.
제3국 이후 딥젠고의 대국 결과를 놓고 다양한 평가가 나올 겁니다. 딥젠고와 이겨도 조 9단의 랭킹을 운운하며 평가 절하하는 의견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말로 떠들고 있는 사이 일본은 이미 인공지능 분야에서 한참 앞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