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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 스브스] 시민 안전 걸려있는데…도로 위 '시한폭탄' 버스

너무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을 뿐인데 해고를 당했습니다. 시민들의 안전과 생명이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2년 전 서울의 한 시내버스 회사에 취직한 A 씨, 그는 운전해야 할 버스를 보고선 기겁을 했습니다. 거의 폐차 직전의 상태였던 겁니다.

특히, 엔진 오일이 계속 새고 있었습니다. 국가 공인 차량 정비사 자격증도 갖고 있었던 그는 이런 버스는 절대 운행할 수 없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주행 중에 엔진 오일이 새서 뜨거운 머플러에 닿게 되면 불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배들은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 지금까지 다 그렇게 타왔다"면서 조용히 운행하라고 했습니다.

회사 지침도 이상했습니다. 엔진 오일이 새면 그냥 다시 채워 넣으면 된다는 겁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스펀지 밟는 느낌이 났습니다.

브레이크 패드가 다 닳아서 제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브레이크가 그렇다면 그냥 천천히 가면 된다는 황당한 답변을 내놨습니다.

타이어도 다 마모돼 있었지만, 타이어가 터져야만 교체가 가능했고 교체 시기를 확인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 정비를 요구했지만, 선배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나도 죽을 뻔 했다. 그래도 운 좋게 넘겨왔다."면서 참고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입사 한 달 만에 해고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입사 후에 받는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같은 이유로 해고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는 서울시에 이런 사실을 알리는 민원도 넣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운이 없으면 사고가 나서 숨질 수도 있는 상황, 서울에서만 매일 560만 명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물론 모든 버스가 이렇진 않겠지만, 도로 위에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고 참 걱정입니다.

▶ 운에 맡긴 목숨…'러시안룰렛' 버스의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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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천재 12살의 동혁 군, 초등학생인데 수능 문제까지 풀 만큼 공부는 잘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싫어합니다. 한창 뛰어놀 나이인데 말입니다.

이에 정신과 전문의 노규식 박사가 혹시 친구들이 괴롭힌 적 있니 묻자 동혁이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는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동혁이는 도와줄 거란 생각에 부모님에게 말한 적도 있었지만, 부모님은 그냥 참으라고만 했습니다. 그게 더 큰 상처로 남아있었던 겁니다.

아이를 잘 키웠다고 자부했던 어머니는 당시에 동혁이가 또래보다 좀 약한 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곧 전학을 보내려고 참으라고 했던 건데 이렇게 큰 상처 받을 줄 몰랐다면서 부모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노 박사는 대체로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데 아이도 엄마도 많이 울어 눈물 제조기란 별명까지 갖게 됐습니다. 왜 박사님과 얘기를 하면 다 우는 걸까요?

눈물을 흘린다는 건 그만큼 감정적으로 아이도 성숙했다는 얘기라고요, 아이들은 아무도 자기 얘길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진심으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보였습니다.

또 부모는 아이의 속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후 그동안 내 행동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미안해서 울었습니다.

노 박사는 아이를 힘들게 하는 부모도 나쁜 부모가 아니고 부모를 힘들게 하는 아이도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모님과 안 통할 때 많이 힘들겠지만,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반드시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올 거라고 말이죠.

▶ 전문적으로 사람들 울리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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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독도도 없었을 겁니다. 독도 최초의 인류를 소개합니다. 35년 전만 해도 가파른 바위섬 두 개뿐이었던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서 명태도 말리고 노랫소리도 들리는 사람 냄새나는 곳으로 바뀐 겁니다. 그 시작은 바로 이 분 덕분이었습니다.

울릉도의 평범한 어부였던 최종덕 씨가 독도에 들어온 뒤에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어장을 찾다가 전복과 소라가 많은 독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 뒤 울릉도 해녀와 어부들을 데리고 독도에서 본격적인 조업에 들어갔습니다. 캐도 캐도 나오는 또 해산물에 일감이 끊이질 않자 아예 움막을 짓고 1년의 대부분을 독도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정부에서도 독도에 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최 씨는 독도를 사람 살만한 데로 만들어 보자고 결심을 하고 이 무인도를 혼자서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유일하게 담수가 나오는 곳까지 1천 개의 계단을 직접 만들었고, 동도와 서도를 잇는 전화도 자비로 개통했습니다.

이후 최 씨는 가족도 데려와서 독도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부터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국제법상으로 독도가 무인도면 일본의 억지 주장에 말려들 수도 있단 걸 알게 된 그는 독도에 정식으로 전입신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독도 최초의 인류가 된 겁니다.

독도에서 이렇게 딸도 낳고 손주까지 보고 3대를 이뤘습니다. 그러던 1987년 태풍 때문에 파손된 집을 고치기 위해서 대구에 나갔다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갓 환갑을 넘긴 나이였습니다.

'독도 사람'으로 평생을 산 공을 기리는 기념비가 이렇게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독도에 사람이 살아야 진정한 우리 땅이 된다고 했던 최종덕 씨, 그 뜻을 이어서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 독도 최초의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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