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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 불가리아 반체제인사 '우산 암살' 결국 미스터리로

1978년 9월 7일 런던, 템스 강 워털루 다리 옆 버스정류장에서 한 40대 후반 남성이 출근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오른쪽 허벅지 뒷부분에 따끔하는 통증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건장한 체구의 한 남성이 떨어뜨린 우산을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우산을 든 남성은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더니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고, 재빨리 도로를 건너 택시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허벅지를 찔린 남성은 사무실에 도착한 후에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찔린 곳을 살펴보고는 작고 붉은 뾰루지를 발견했다.

이후 몸에 이상을 느끼고 일찍 퇴근했지만 증세가 더 심해졌다.

그날 저녁 고열에 시달리던 남성은 입원했고 그로부터 나흘 후 49세로 숨을 거뒀다.

사인은 소량으로도 치명적인 독극물 '리친(리신)' 중독으로 나타났다.

리친 중독으로 숨진 남성은 불가리아인 망명 작가이자 반체제인사인 게오르기 마르코프다.

부검 결과 마르코프의 몸에서 지름 1.7㎜ 크기의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만들어진 알갱이(펠릿)가 발견됐다.

금속 알갱이에는 엑스자형 홈을 파서 리친을 채워 넣었고 외부는 당 성분으로 코팅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금속 알갱이가 피부 속으로 침투하면 체온으로 당이 녹으면서 리친이 흘러나와 온몸에 퍼지게 된다.

마르코프가 리친 중독으로 숨지기 전에도 두 차례 암살시도가 있어 배후가 당시 불가리아 철권통치자 토도르 지프코프 정권과 옛 소련일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뚜렷한 증거는 없었다.

마르코프 독살 정황은 추후 기밀 해제된 문건에서 드러났다.

2005년 기밀 해제된 불가리아 공산당의 문건에서 불가리아 비밀경찰(DS)이 마르코프 독살의 배후이며, 암살범은 골동품 판매상으로 위장한 DS 요원 '피커딜리'(암호명)라는 내용이 나왔다.

마르코프가 사망하기 전 동료들에게 '뭔가에 찔려 고개를 돌렸을 때 우산을 집는 남자를 봤다'고 말했기에 이 사건은 '우산 암살'로 알려졌고, 2006년에는 동명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리친 총알'은 옛 소련 비밀경찰, 즉 국가보안위원회(KGB)가 개발한 기술로 알려졌으나, 우산이 마르코프에게 리친을 발사하는 무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르코프 암살 열흘 전 비슷한 독살 시도를 겪은 불가리아 출신 망명자는 우산이 아니라 암살자가 들고 있던 소형 가방 안에 리친 펠릿을 발사하는 총이 들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스파이영화에 나올 법한 수법으로 망명한 반체제인사를 살해했고 지금까지도 전모가 가려져 있다는 점 등에서 냉전 시대를 대표하는 암살 사건으로 꼽힌다.

불가리아 비밀경찰과 KGB가 암살에 관여했다는 정황과 암살자 신원도 드러났지만 결국 아무도 재판을 받지 않았다.

뒤늦게 수사 및 기소 여론이 일었지만 2013년 9월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작년 9월 불가리아 의회가 옛 공산정권이 자행한 범죄에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도록 형사소송법을 개정, 마르코프 독살사건이 다시금 수사대상으로 부상했다.

의회는 마르코프 암살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슬람교도 강제 개명 등 다른 공산정권의 범죄도 단죄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공소시효 폐지법률은 사회통합을 저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큰 논란에 휩싸였고, 검찰도 강하게 반발하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불가리아 헌법재판소는 14일 공산정권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고 AFP통신 등이 15일 전했다.

이로써 우산 암살의 전말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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