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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토록 많은 미덕을 갖춘 거장, 플라시도 도밍고

'음악계의 르네상스 맨' 플라시도 도밍고 인터뷰 후기

[취재파일] 이토록 많은 미덕을 갖춘 거장, 플라시도 도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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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가 주말 내한공연을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20세기 후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그가 75살 백발 노신사의 모습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나고 카레라스는 건강 때문에 무대에서 보기 어려워졌지만, 단 한 사람, 도밍고만은 건재합니다. 75살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 거장을, 내한공연 공식 기자회견이 끝난 뒤 따로 만나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가능한 간결하게 인터뷰를 해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뉴욕에서 13시간 반을 날아와 이튿날 바로 공식 기자회견과 첫 공연 연습에 나서는 그의 빡빡한 스케줄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70대라는 나이를 고려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수다스럽거나 동문서답을 해서 인터뷰가 길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와의 인터뷰가 너무나 즐겁고 유쾌해 ‘용건만 간단히’ 끊기가 어려웠던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방송 뉴스에는 다 담지 못했던 그와의 인터뷰를 취재파일을 통해 조금 더 소개해보려 합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인터뷰
거장에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건 ‘그의 넘치는 에너지가 대체 어디서 오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테너였고, 지금은 현역 바리톤입니다. 지휘자로서도 꾸준히 명성을 쌓아왔고, 로스엔젤레스 오페라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으며, 동시에 오페라리아라는 국제 성악 콩쿠르를 주관하기도 합니다. ‘음악계의 진정한 르네상스 맨(a true renaissance man in music)’으로 불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는 답합니다. “내 에너지는 열정(passion)에서 옵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오페라에서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며 나는 여전히 그 열정을 느낍니다.…음악은 내게 삶이에요. 음악이 없이 사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답니다.”

그럼에도 반세기 가까이 테너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린 그가, 7년 전 남들 같으면 은퇴를 얘기할 68살의 나이에 바리톤에 도전한 이유는 여전히 궁금했습니다. 지난 영광에 머물며 콘서트 투어만 다녀도 부와 명예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그인데, 반세기 만에 바리톤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시험대 위에 세우다니 말이죠.

이번에도 그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반세기를 테너로서 노래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 목소리는 어떤 높은 음은 더 이상 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바리톤의 노래를 부르게 된 겁니다.…바리톤으로서 부를 수 있는 멋진 노래들이 많았고, 나는 기꺼이 하고 싶었어요. 나의 새로운 배역들을 관객들이 좋아해줬고, 극장도 계속 나를 찾고 있으니 행복할 따름입니다.”

여전히 왕성하게 오페라 무대에 서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테너 배역을 더 이상 소화해내기 어려워졌을 때, 물론 콘서트만 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새로운 오페라를 올리려면 하루 6~8시간씩 2~3주를 연습해야 하는데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아직 체력적으로 강하고 적어도 3년 정도는 오페라 무대에 계속 설 겁니다. 내가 할 수 있고, 사람들이 내 연기를 보고 싶어한다면요.”

지금까지 147개의 배역을 맡아 3800회가 넘는 오페라 무대에 섰고 500회 이상의 공연 지휘를 했으며 수백 장의 음반과 필름 작업을 해온 그에게, 그래도 지난 경력에 후회 되는 점은 없는지 물었습니다. 때로는 대중문화와 결탁했다든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받았고, 지휘자로서의 활동으로 과도하게 여러 영역에 손을 댄다는 지적도 들었던 그였으니까요.

“때로는 실수도 했지만 실수로부터 배우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음악가로서 살아온 삶에 조금의 후회도 없습니다. 테너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유감도 없습니다. 테너로 활동하며 원하던 모든 배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고, 지금은 또 바리톤의 다양한 배역과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즐기고 있으니까요. 젊은 예술가 교육과 경연을 지원하고 오페라의 예술감독을 맡는 것 또한 제겐 즐겁고 중요한 일입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인터뷰
겸손하고 열정이 묻어나는, 흠잡을 데 없는 인터뷰 내용입니다만, 그의 말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아닙니다.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으니까요.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 그의 ‘말’이 아닌 사려 깊고 따뜻한 ‘태도’였습니다.

세계적인 스타의 내한공연을 준비하는 기획사의 직원들은 혹시라도 아티스트의 심기를 거스를까 늘 쩔쩔매곤 하는데, 이 거장은 인상 한번 쓰지 않고 그 흔한 까탈도 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습니다. 기자의 부상(전 왼쪽 발에 깁스를 한 상태였습니다.)에도 진심 어린 관심과 위로를 건네고 한국과 스페인의 문화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도 듣던 대로 따뜻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자회견장에서도 그는 이번 공연을 함께 하는 신인 성악가들을 나란히 앉히고 한 명 한 명 인사를 하게 한 뒤 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져달라고 거듭 강조했는데, 콘서트에서 자신의 쉬는 시간을 대신해줄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 모두를 ‘목적’으로 대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호세 카레라스와의 유명한 일화도 새삼 떠올랐습니다. 카레라스가 백혈병 투병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도밍고가 그를 몰래 도왔다는 얘기 말이죠. 카레라스의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백혈병 환자를 돕는 재단을 만들어 이를 통해 카레라스를 몰래 도왔다는 도밍고.

‘음악계의 진정한 르네상스 맨’이라 불리는 거장이 이런 인성과 품격까지 지녔다니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그의 건강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의 재능과 열정을 뒷받침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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