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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pick] 96년 전 오늘…유관순 열사가 눈을 감았다

[뉴스pick] 96년 전 오늘…유관순 열사가 눈을 감았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입니다. 96년 전 오늘인 1920년 9월 28일은 유관순 열사가 눈을 감은 날입니다.

17살에 3·1운동에 참여해 18세에 옥중에서 순국한,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유관순 열사는 그렇게 역사의 귀감이 됐습니다.

이날을 기념하면서, '뉴스 픽'에서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 책임연구위원의 설명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유관순 열사는 음력 1902년 11월 17일,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조선 중기 광해군 복위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박해를 입은 고흥 유씨 집안으로 그후 경기도 가평, 춘천과 충청도 목천으로 후손이 갈라져 나왔는데, 가평의 문중에서 한말 대표적 유림 의병장 유인석 선생이 나왔고, 목천의 문중에서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가 나왔습니다.

이 집안에서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어께너머로 혼자 한글을 깨치고 성경구절을 외는 등 총명한 면모를 보여 주었고, 여성교육이 남달리 열성적이었던 미국 여선교사 엘리스 제이 햄몬드 샤프의 눈에 띄어 1915년경 이화학당 2학년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샤프부인, 이화학당 교육, 정동교회의 손정도, 이필주 목사 등 민족주의적 기독교 지도자 등이 유관순 열사에게 민족의식과 근대여성의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괄괄한 성격에 부지런하고 열성적이었던 한편으로 뜨개질과 바느질을 잘 하는 섬세한 면모도 있었고, 또 장난꾸러기 같은 짓궂은 면도 있었습니다.

1910년 3·1운동에 이르는 10년간 일본의 한국 통치는 말할 수 없는 억압의 공포정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조성된 해방과 독립의 국제적 분위기에다가 광무(고종)황제가 갑작스럽게 서거함으로써 조성된 민족적 공분의 분출은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항일독립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서울 시내의 시위운동에 합류하였고,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도 다시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던 것을 학교당국이 경무총감부와 교섭하여 석방시켰습니다.

이러한 시위가 있기 전에 도 유관순 열사는 태극기를 온 교실과 기숙사 벽에 붙인다든가, 다섯 친구들과 5인의 결사대를 만들어 태극기와 애국가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등의 애국의식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고향 천안으로 내려오는 기차안에서도 유관순은 “칙칙폭폭” 하는 기차소리조차 “대한독립, 대한독립”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할 정도로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튿날 목천보통학교 200여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곧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저지되고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 듯 했습니다.

유관순은 부형들을 설득하고,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습니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3월 31일 밤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유관순은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습니다.

각지 마을의 산봉우리에서 이에 호응하여 횃불이 그믐밤을 밝혔습니다.

4월 1일 각지에서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명의 장꾼이 모여들었습니다.

오후 1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유관순은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습니다.

병천 일본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다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헌병은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질질 끌고 갔습니다.

이를 본 유관순의 양친이 끌려가는 딸을 뒤따라가며 필사적으로 만세를 외치자 다시 총검으로 아버지 유중권와 어머니를 찔러 절명케 했습니다.

이때 유관순은 헌병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피신할 수 있었으나, 얼마 후 붙잡혔습니다.

이날 공주에서는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준석)이 공주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의 칼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아우내 만세시위에는 많은 여성들이 참여한 것도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일본군의 잔혹한 총검에 많은 사상자가 생겨나자 여성들은 치마에 냇가의 돌들을 싸와 일본군을 행해 던지며 대항했습니다.

유관순은 공주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받았는데,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대해 항의하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때문에 중형을 받았습니다.

유관순을 비롯한 아우내 시위 주도자들은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유관순은 3년 형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최종심인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유관순은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유열사는 다시 감옥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하였습니다.

이때 다시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습니다.

아우내 시위 때 입은 상처와 그간의 갖은 고문에다 방광파열이 겹친 유관순에게 일제 당국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하였습니다.

유관순은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습니다.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기념 특사로 형기가 1년 반으로 단축되어 석방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으나 일제 군용지 개발로 인해 무덤조차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그녀의 고향 현 천안시 병천면 지령리에는 생가와 기념교회, 사우, 기념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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