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할아버지 나무님, 만수무강 하소서

천연기념물 거목, 보호수는 자연 문화 역사 자원…보호 관리 만전 기해야

우리나라 어느 고장이든 나이 먹은 큰 나무를 거의 빠짐없이 볼 수 있다. 오래 됐으니 고목(古木), 크고 우람하니 거목(巨木)이기도 하다. 대개 마을 어귀나 정자 옆에 서 있어서 정자나무라고도 부르고, 때로는 신당 곁에 뿌리 내려 오랜 세월 서민들의 치성을 받아온 까닭에 서낭나무나 당목이라고도 부른다. 때로는 유서깊은 사찰이나 서원, 향교 뜰에 자리해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높여주기도 한다. 어디에 있든 긴 풍상을 버텨내며 살아온 나무를 보면 사람들은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마련이다.   

"워낙 긴 세월을 보냈으니까 사실 좀 힘겹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의 격변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지켜봤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버겁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서울 방학동 연산군 묘 앞에는 8백30살 된 은행 거목이 우뚝 서 있다. 높이가 25m, 둘레는 10.7m로 어른 예닐 곱 명이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다. 자연생태 해설을 한다는 윤경진 씨가 추석 연휴를 앞두고 나무를 보러 와서 밝힌 소감이다. 

길어야 여든 안팎이면 기력이 쇠해 세상을 떠나는 인간에 비하면 8백여년 생명을 이어온 방학동 은행나무는 얼마나 많은 사연을 품고 있을까?

크고 오래 된 나무를 역사의 목격자라고 부를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특히 이 나무는 나라에 큰 변고가 있으면 불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1968년에 서울특별시로부터 보호수 제1호로 지정받았다.

지정만 하고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허사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산업화, 도시화 바람에 시달려 1990년대 초에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와 연립주택이 들어서면서 뿌리와 가지를 제대로 벋을 수 없게 된 때문이다. 

주민들이 간절히 탄원한 끝에 2007년에 도봉구가 예산 40억 원을 들여 나무 근처 빌라 한 동을 사들여 철거하고, 처진 가지를 받침대로 괴어 주면서 보살피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2013년 3월에 이 나무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했다.

'지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모습이 아름다워 문화재적인 가치가 크므로 생육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구역을 지정해 보존하고자 한다'고 서울시는 밝혔다.

은행나무 가지가 벋은 데까지 넓게 울타리를 둘러치고 그 밖으로는 목재 데크를 설치했다. 주변 땅이 사람들에게 밟혀 굳어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지역민들의 관심과 사랑,도봉구와 서울시의 예산을 곁들인 보호 시책이 합쳐지면서 은행 거목은 생기를 회복했다.
서울 종로구 명륜3가 성균관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면서 바로 오른쪽엔 조선시대 한양의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이 있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와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신 문묘인 대성전(大成殿)이 앞에 있고 뒷 건물은 교육의 공간으로 인륜을 밝힌다는 뜻의 현판을 단 명륜당(明倫堂)이다.

명륜당 앞뜰의 절반 넘는 땅에 우산처럼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그늘을 드리운 은행거목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문묘를 1602년에 재건하면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문화재 당국의 설명대로라면 4백 살이 넘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자리를 행단(杏壇)이라 부른 데서 연유해 서원이나 향교엔 은행을 심었다. 원래는 살구나무지만 은행으로 바뀌었다는 식물학자의 주장도 있다.    

서울문묘 은행나무는 1962년에 국가로부터 천연기념물(제59호)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다. 성균관과 문묘 자체가 역사적인 건축물로 보호 대상인만큼 경내의 나무 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원래 이 은행나무는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였는데 선비들의 배움터이자 성현을 제사하는 신성한 공간에 열매가 떨어져 냄새를 풍기고 지저분하기에 선비들이 제사로 기원하자 나무가 스스로 '성 전환'을 했다고 성균관의 맹강현 교무부장은 웃으며  전설을 소개한다. 

학문에 매진하며 나라의 인재가 되기를 바라는 유생들의 열정을 존중한 나머지 생겨난 스토리텔링이라고 해석할 만하다.  방학동 은행과 마찬가지로 이곳 은행도 굵은 가지에 아래로 길다란 홍두깨 모양이나 젖꼭지 모양의 특이한 돌출부가 생겨났다.

은행 거목의 특징인 유주(乳株), 또는 공기뿌리로서 공기를 통해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한다. 아기 낳기를 바라는 여인, 갓난 아기 먹일 젖이 잘 나오길 산모들이 이 부분을 잡고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룬다는 속설도 전해온다.
서울 회현동1가 203, 서울시 보호수 은행나무, 나이 520년 추정
반면에 도심 한 가운데 자리한 거목 가운데는 주변 여건이 급격하게 변해 건강 상태가 비교적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우리은행 본점 옆 은행나무는 키 24m에 둘레가 7m, 나이가 5백살을 넘은 서울시 지정 보호수이긴 하지만 고층빌딩에 둘러싸인데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한 가운데 서 있어서 방학동이나 서울문묘 은행보다는 여건이 좋지 않아보인다.

뿌리를 벋을 주변이 온통 아스팔트로 덮인데다  차와 사람, 소음, 진동, 매연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사람으로 치면 심호흡하기도 손 쳐들고 다리 벋고 맘껏 기지개 켜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나무의 활력도를 측정하는 사이고미터(Shigometer)라는 기계의 탐침을 나무 생장부인 거죽 안쪽 형성층에 대 보니 전기저항값(킬로옴)이 9~17로 나왔다. 서울문묘 은행 4~7보다 2배 이상 높다. 수치가 높을수록 나무 활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나무가 생육하는 공간 안에 인위적인 시설물들이 있고, 그것이 뿌리의 생육이나 나무 생장에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치워주거나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취재에 도움을 준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손지원 박사의 말이다. 손 박사는 한국환경생태학회지(제30권 제3호,2016년 6월)에 '관리시설에 따른 천연기념물 노거수 생육상태 분석'이라는 논문을 내서 전국의 천연기념물 거목 39그루의 관리 실태와 문제점, 해법을 짚기도 했다.

개발을 구실로 나무 가까이 도로를 지나가게 해서 땅이 눌리거나, 나무를 보호한다고 석축을 둘러쳐서 뿌리를 다치게 하거나, 흙을 지나치게 덮거나, 보호 울타리를 나무 밑둥 근처로 옹색하게 쳐서 나무 둘레 땅이 밟혀 굳게 하는 것 등을 부실한 관리 사례로 들었다.
 나무 세포 생장부의 전기저항값을 측정해 활력도 비교
거목의 생리를 연구하며 치료도 하는 나무병원 이승제 원장은 '복토를 지나치게 하거나 땅이 굳으면 토양에 산소가 부족해서 뿌리가 호흡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오래된 큰 나무의 뿌리가 땅 위로 솟는 것도 이 때문인데 관리하는 사람들이 까닭도 모르고 드러난 뿌리에 다시 흙을 덮어서 나무를 더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경계석 울타리를 설치할 때도 나무가 가지를 벋은 끝 밖으로 넓게 해야 한다고 이 원장은 지적했다. 아무리 거목이라도 수백년 나이가 들면 작은 관리 실수에도 금세 활력을 잃을 수 있는 법이다.

2016년 8월 현재 전국의 천연기념물 거목(일명 노거수;老巨樹)는 169그루다. 태풍에 쓰러지거나 노쇠한 까닭에 명을 다해 결국 문화재 지정이 해제된 경우도 지난 10년 사이 6건이나 된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한다.
산림청 집계로 전국의 지정 보호수는 2015년 12월 말 현재로 1만3천671그루이며, 이 가운데 서울에는 2백12그루가 있다. 서울이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도로 6백 년을 이어온 만큼 유서 깊은 거목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어디든 장수하는 큰 나무가 있는 곳엔 거의 빠짐없이 나무와 고장, 인물과 자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들 거목은 자체로 자연, 문화, 역사 자원이면서 지역사회를 하나로 엮는 구심체, 지역민을 위한 휴식처 공원의 중심, 심지어 관광 자원의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다만 수백 년 장수한 할아버지 나무가 계속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만 가능하다.

명절에 고향에 가거든 부모님을 뵙고 나서 고향에 뿌리박고 살아온 큰 나무도 찾아가 품에 안겨보길 권한다.  할아버지 나무들이 만수무강할 수 있으면 사람도 그 은덕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유산정보> 문화재검색
- 산림청 홈페이지>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식물자원>식물분류>보호식물>보호수


[2016.09.17 8뉴스 관련기사] 
▶ 800년 세월 지킨 할아버지 나무…도심 개발에 비틀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