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내 슬픔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또 다른 재난의 공간, 체육관

이미 실컷 울었는지 붉은 눈을 한 채 나타난 양궁선수. 그녀가 들어선 곳은 체육관이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한강에 나타난 괴물에 잡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통곡하는 유족들 사이로 찬 바닥에 넋이 빠져 주저 앉은 늙은 아버지와 축 늘어진 오빠(죽은 아이 아빠다)를 발견한다.

그리고, 기어코, '설마'하며 다가간 영정사진들 가운데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낯익은 여중생의 얼굴을 발견한다. 조카다. 멀리서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병째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또 한 명의 가족이 다가온다. 양궁선수의 오빠이자 둘째가라면 서러울 조카바보 삼촌이다. 이로써 황망하게 가 버린 아이를 뺀 나머지 가족이 모두 모였다. 
영화 '괴물'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체육관 1층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양궁선수 고모와 조카바보 삼촌, 애 아빠와 이들 삼형제의 늙은 아비까지. 네 사람이 서로를 얼싸안고 오열하다 넘어진다. 기자들은 좋은 그림이라도 되는 양 득달같이 달려와 플래시를 터뜨리며 근접 촬영한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가족들을 따라가며 쉬지 않고 찍어댄다. 조카바보 삼촌이 욕을 하며 저항해 보지만 헛발질일 뿐이다.

이 와중에 체육관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2487 아반떼를 잘못 주차한 사람'을 찾는 경비아저씨의 호통이 울려퍼지고, 검은 상복을 입은 한 아주머니가 몹시 송구하다는 몸짓을 하며 밖으로 달려나간다. 연신 유족을 찍어대던 기자들은 수행원만 수십 명 대동한 높으신(것으로 추정되는) 분이 나타나자마자 썰물 빠지듯 떠나간다. 분향소 왼편으로 조화들이 서 있는데 그 중 하나엔 흰 리본 위로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가족 대책위원회'라고 적혀 있다.   
영화 '괴물'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2005년에 촬영돼 2006년에 개봉했다. 스무 번 가까이 다시 봤지만, 여전히 체육관을 그린 이 장면에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겠다.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주인공 가족들, 현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어 피식 웃음이 날 정도인 합동분향소 내 인간군상까지. 분명 감독은 관객이 웃길 바랐던 것 같은데... 어쩔 줄 모르겠다. 화끈거리고, 괴롭다. 
함양아 <잠,2015><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제공:서울시립미술관)" id="i200979476"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60917/200979476_1280.jpg" style="display:block; height:343px; margin:20px auto; width:610px">
# Artist: 함양아 Yang Ah Ham 작품명: <잠, 2015> 비디오 설치, 반복, 가변 크기 
- 전시중: 11월 20일까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서울시립미술관


체육관은 건강 증진이라는 사회 복지적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지만, 재난이나 위기의 상황에서는 임시 대피소로도 이용되며, <잠>에서 보여지는 체육관과 사회적인 몸들은 각각 지금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사회 시스템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들을 상징한다. 체육관 바닥에 어지럽게 놓인 검은색 매트 위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그들 옆에 나란히 놓인 의자에 꼿꼿이 앉아 상황을 바라보다가 잠이 드는 사람들, 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옆에 앉거나 서서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닥에 누워 잠을 자는 사람들은 재난이나 위기 상황의 일차 피해자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드는 사람들은 사회의 여러 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입장들, 행위를 통해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통제하는 사람들은 사회시스템을 대변하는 법이나 사회적 규율 등의 은유적 표현이다. 종종 불안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카메라 앵글들은 이들의 잠이 결코 편안한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하며, 지금 현재 여러 사회에서 벌어지는 위기의 상황들을 대면하는 개인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담는다...

* 위의 글과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각 저작권자에 있으며, 저작권자와 서울시립미술관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유족들 정신없는 틈을 타 가족사를 함부로 물어보고, 우는 모습을 찍고, 저렇게 하면 안되는데. 돗자리 하나 허름한 담요 몇 장이라니, 그걸론 안되는데. 소중한 사람을 잃고 가장 나약해지는 순간인데, 누구도 자신의 모습이 이토록 날것으로 기록되길 원치 않을 텐데.'

재난 수준의 사건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됐다. 체육관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무방비 상태로 처절한 비극의 순간을 맞이하는, 그리고 그것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실종자 가족과 유족들을 보면서. 그땐 분명 그게 불편하다고 느꼈는데. 그 후로 달라진 게 없다. 우린 또 대형사고가 터지면 비슷한 방식으로 (불행한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내 이웃을 체육관 가운데에 구분 없이 한꺼번에 몰아넣고 타자화할 것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가구당 26.4m²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이재민들을 14개 체육관에 분산 수용했고 일부 체육관에는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칸막이도 설치했다. 캐나다의 한 디자인그룹은 이재민을 위해 간편하게 설치할 수 있는 종이벽을 제작해 실용화한 적도 있다. 유엔 역시 재난 발생 시 1인당 최소한 3.5∼5.5m²의 공간을 확보토록 권고하고 있다. 1인당 공간이 이 기준에 미달할 경우 다른 시설에 이재민을 수용해야 하고 구호물품 역시 이 기준에 따라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 사생활 보호-1대1 맞춤지원, 시혜 아닌 피해 가족의 권리/동아일보/ 2014.05.02.

Disaster Relief Projects1 (출처: 반 시게루 홈페이지)
Disaster Relief Projects2 (출처: 반 시게루 홈페이지)
  - 일본 대지진 당시 체육관에 종이와 천으로 가림막을 설치한 건축가 '반 시게루'의 <Disaster Relief Projects> 가운데 Paper Partition System 4
      
체육관이라는 일상의 공간이 슬픔을 겪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탈바꿈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일본처럼 이런 정도의 배려는 어려울까. 때때로 시행되고 시행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야말로 '시혜'가 아니라 '제도화'될 수 있도록 말이다. 종이와 천으로 칸막이를 설치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을 보장해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여럿이 함께 겪은 재난이라고 해서 각자가 떠안은 슬픔, 프라이버시까지 공유될 필요는 없다. 그런 극한 순간일수록 인권이 침해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그게 지금껏 그렇지 못했다. 나부터도 허겁지겁 취재에 투입된 후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훈련받은 대로 기계처럼 대응했다. 

다음엔 꼭 달라지고 싶다. 슬퍼하느라 정신없는 피해 당사자들을 대신해 '저기요, 이 분들 이렇게 노출되어선 안됩니다. 공간을 마련하고 보호해야 합니다'라고 요구하겠다. 또, 꼭 우리가 이 순간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겠다. 당사자들에게 동의를 받을 수 없다면 절대 사적인 영역에 침범하지 않겠다. 꼭 그렇게 하겠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