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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지진 피해…100여 명 사망"…1,243년 前 한국

[취재파일] "지진 피해…100여 명 사망"…1,243년 前 한국
‘천년 고도’ 경주는 역사가 긴 만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7년,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裵)·설(薛)의 성씨(姓氏)를 가진 6부의 촌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지진 이야기입니다. 지난 12일 경주 지진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 역시 바로 삼국사기의 지진 기사였습니다.
 
三國史記九卷 新羅本紀 惠恭王
十五年, 春三月, 京都地震. 壞民屋, 死者百餘人, 太白入月, 設百座法會

삼국사기9권 신라본기 혜공왕
십오년,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발생해 민가가 무너지고 백여 명이 숨졌다.
금성이 달 속으로 들어갔다. 백좌 법회를 열었다.

 
전성기 신라의 가구수는 17만 호로 인구는 약 90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대도시였다고는 하나 지금처럼 고층 빌딩이 없는데도 지진으로 100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는 걸 보면 지진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피해 규모 등으로 미뤄 볼 때 당시 진도가 6.0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 고려시대, ‘지진 114차례’
 
이기화 전 서울대 교수가 쓴 '한국의 지진'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서기 2년∼935년)까지 발생한 지진은 모두 102회로 각 왕조 수도이며 인구가 밀집한 경주, 평양, 부여, 공주 등에서 주로 관측됐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어떨까요? 제가 편년체 사서인 고려사절요에 나온 지진 관련 기사를 세어 본 바로는 모두 114차례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정밀한 지진 관측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만큼 관측된 지진 모두 사람이 직접 느낄 수 있는 강도, 즉 규모 3.0 이상의 지진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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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기사 내용을 살펴 볼까요? 고려 현종 3년인 1012년 3월과 12월, 이듬해 2월 등 불과 1년 사이에 경주에서 3차례나 지진이 난 걸로 돼 있습니다. 13년 뒤인 1025년 4월에는 영남도(嶺南道) 10현(縣)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적혀 있는데, 이 때 역시 경주가 10현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 의견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고려 정종 원년, 1035년 9월에는 지진이 경주를 비롯한 19개 현을 덮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 이듬해인 정종 2년, 즉 1036년 6월에도 "무진일에 경성(京城)과 동경(東京)·상주(尙州)·광주(廣州) 등 관내 고을에 지진이 나 집들이 많이 무너졌다"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습니다.
 
● 석가탑도 지진 피해
 
이 지진이 있고 2년 뒤인 1038년에 석가탑 2차 중수가 있었습니다. 무구정광탑(无垢淨光塔) 혹은 불국사 서탑(西塔)이라고 부른 석가탑은 1036년 지진 때 일부 손상을 입은 걸로 보입니다. 중수 관련 문건이 '지동'(地動) 즉 지진(地震)을 중수 원인으로 지목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역시 지진을 피해가지 못한 겁니다.
 
이처럼 경주지역에 지진이 잦은 이유는 토함산을 포함한 경주-울산에 걸쳐 있는 '울산단층'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활성단층' 지대에 속한 탓입니다. 지질역사학적으로 보면 대체로 200년 단위로 이 일대에서 지진활동이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이기화 전 서울대 교수가 삼국사기와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와 1905년 이후 지진 기록을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삼국시대 이후 지금까지 역사에 기록되거나 지진 관측으로 보고된 한반도 지진 발생 횟수는 무려 2천600여 회에 달합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우리 나라가 지진에서 안전한 지역은 아닌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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