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대문 앞으로 배달되던 우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과 같은 특수 종이 재질의 팩 우유가 아니라 당시에는 원통형의 유리병에 우유가 담겨 있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병을 따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는지, 병뚜껑 안쪽에 두꺼운 종이 마개가 있어서 손가락으로 잘 제거해야 했다.
몇 번을 휘휘 돌려서 잘 따내면 '퐁' 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리는 날도 있었다. 그나마 살림살이가 중간 이상은 되어야 맛 볼 수 있었던 배달 우유. 초등학교까지 무상 급식이 이뤄지는 요즘 학교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취지는 좋았다. 당장 학교에 공급하는 우윳값이 크게 내려갔다. 수의계약을 못 하게 하니 부정이 끼어들 소지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시장의 질서가 채 잡히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교에 우유를 공급하는 판매상들이 우선 공급처부터 확보할 심산으로 저가 입찰 경쟁에 뛰어들었다.
낙동업계가 주장하는 200밀리리터 우유 한 통의 단가는 360원 선이다. 그런데 입찰에 응한 판매업자들은 손해를 무릅쓰고 가격을 낮췄다. 전교생이 1천명이 넘는 도시 학교들에는 190원, 150원에 우유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최저가 낙찰을 받은 업체들은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를수록 큰 손해를 보게 됐다. 직원을 줄이는 등 갖은 애를 써 봐도 도저히 생존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 4월 A업체가 서울과 경기 지역 60여개 학교 우유 급식을 포기했다. 낙찰가 200원으로 근근이 버티다가 나가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교육청이 발빠르게 다른 우유업체와 수의계약을 맺어 공급 중단 사태를 막았으나 재입찰의 번거로움은 감수해야 했다.
경기도 용인 시내에 있는 A초등학교는 전교생이 800명을 넘어 190원에 공급업자를 찾은 반면, 용인에서도 농촌 지역에 있는 B초등학교는 430원에 겨우 우유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B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70명이었다. 같은 서울이라도 이런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동작구 반경 1킬로미터 이내 가까이 위치한 두 초등학교는 학생 수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전교생이 1800명에 육박하는 C초등학교는 원가의 절반도 안되는 150원에 공급자와 계약했다. 그러나 500여 명이 다니는 D학교는 낙찰가 400원을 내야 했다. 낙농협회가 전국 급식우유의 가격을 파악해 봤더니 최저가 또는 제한적 최저가 입찰제를 통해 우유를 구매하는 서울의 경우 평균 우윳값이 295원이었고, 소액 수의계약을 하는 군 단위 학교들은 400~430원 가량 우윳값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런 학교 현장의 혼란에 비해 교육당국의 태도는 느긋했다. 급식 업무는 대개 교육청 체육건강과 급식기획팀이 담당한다. 교육청은 올해 빚어진 시행착오는 곧 개선될 것이라고 했다. 우유업체들이 출혈경쟁의 쓴 맛을 봤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입찰에 응할 거란 얘기다.
낙농업자들도 스스로 과당경쟁 벌이는 현실을 인정하며 누군가 개입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최저가 입찰제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정밀한 분석과 논의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공공적 기능으로서의 학교 급식이 파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책 당국의 개입이 필요하다.
소외된 지역의 작은 학교들을 시,군 단위로 묶어 입찰에 참여하도록 하는 등의 방식이 대안이 될 것이다. 그 옛날 내가 마셨던 고소한 배달 우유처럼 급식 우유가 학교에 안정적으로 공급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