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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용산공원 가지고 정치 좀 합시다

[취재파일] 용산공원 가지고 정치 좀 합시다
'용산‘. 멀게는 한국 근세(近世)사에서부터 가깝게는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질곡의 아픔을 경유했던 공간이다.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침탈‘의 역사는 1904년부터다. 러일 전쟁 이후 일제의 병참기지가 현재 남아있는 ’용산미군기지‘의 전신이다. 광복 후 총독 관저를 포함해 사령부 시설까지 남아있던 공간을 미국이 그대로 흡수했다. 그 뒤로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군기지가 자리를 잡았다.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용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는 합의가 이뤄지고 14년 만인 내년 말이면 군사 거점이었던 용산기지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2005년 정부는 이 대지에 국가공원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는데, 계획대로라면 국가가 주도해 조성하고 운영하게 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공원’이 되는 것이다.

‘용산공원’을 둘러싼 논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 ‘설전’이 꽤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링 위에 올라온 선수는 두 기관. 서울시와 국토교통부다. ‘국가’ 공원이니 국가가 조성하겠다는 국토부의 의견은 타당한 명분을 갖추고 있다. 법에도 있다.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제14조에는 공원 조성의 책임 주체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장관은 제13조에 따라 수립·고시된 종합기본계획에 기초하여 용산공원조성지구에 관한 조성계획(이하 "용산공원조성계획"이라 한다)을 수립하여야 한다.”
●서울시의 사정, “국토부 단독으로는 안 돼”

다만 서울시의 입장은 이렇다. “용산공원 조성계획은 시민과의 소통과 공감을 외면한 상태로 중앙정부 독단적으로 추진돼 왔다. 여러 중앙부처가 나눠먹기식으로 필요한 시설의 입지요구를 해왔다.”(지난달 31일, 박원순 서울시장 기자회견.) 오죽했으면 국토부 명분의 핵심인 특별법까지 바꾸자고 나섰다. 이름을 빼자는데 국토부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벌써 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8뉴스 리포트 보기 ▶ 거듭되는 '용산공원' 조성 갈등…문제 된 부분은?) 서울시를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들도 이미 공개 토론회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갈등’의 요지는 크게 두 줄기다. 서울시 쪽에서 말하자면 "국토부 혼자서 공원 만들지 말라"는 것과 "반쪽짜리 용산공원 만들지 말라"는 것이고, 국토부 쪽에서 말하자면 "우리를 믿어 달라"는 것과 "서울시는 국토부로 제안 내용을 공문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용산공원 지도를 배경으로 선 박원순 시장은 지금의 용산공원 대지를 이미 선점하고 있는 드래곤 힐 호텔, 국방부 부지, 헬기장 그리고 곧 입주할 한미연합사 잔류 대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공원으로 만들 땅이 전체 기지의 68%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뮬레이션 상 그렇게 남은 공원의 형태도 묘했다. 연합사를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쪼개진 용산공원의 모습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애잔해 할 분단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박 시장은 이 ‘형태’에 대해 기자회견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서울시에는 ‘용산공원전략팀’이 있다. “원점부터 재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관계자가 말했다. 용산공원의 경계를 확정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놓고, 연합사 잔류 대지나 기타 미국대사관 입주 등을 두고도 미국과 재협상을 벌일 용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경계를 획정하기 전, 나아가 용산공원 조성의 기본적인 ‘방향’을 터놓고 논의하기 전부터 누군가가 자꾸 빈 대지에 뭘 지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국토부다.

국토부는 지난 4월 공청회를 치르려다 홍역을 치렀다. 콘텐츠 계획안을 공모해 7개 부처에서 제출한 8개 시설물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공청회 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각 부처에서 수 백억 원 대의 대형 시설물들이 계획안으로 올라왔다. 경찰청은 남영동에 있는 박종철 기념관과 가까워 과거 경찰의 과오를 반성할 수 있다며 국립경찰박물관을 짓겠노라 했고 미래창조과학부는 한국 정보통신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싶다며 국립과학문화관을 세우겠다 했다.

“공원이 신축 건물들의 위용을 뽐내는 각축장이냐”며 빗발치는 비판에 국토부는 심의 확정 기일을 미뤘다. 국토부로선 쓰라린 상처의 기억이었고, 서울시에겐 용산공원 조성 계획에서 국토부 이름을 빼야 한다는 확신을 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진=연합뉴스
●국토부의 사정, “공문을 보내 달라”

31일 서울시장 기자회견 뒤 국토부는 즉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2007년 특별법 제정 이래 국토부가 경주했던 노력이 깔끔하게 정리돼 왔다. 석장의 자료 안에 국토부가 지향하는 용산공원의 조성계획이 모두 들어 있었다. 국토부는 ‘생태 중심의 단일 공원’을 지향하며 이미 2014년에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종합기본계획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또 앞으로도 다양한 창구를 통해 폭넓은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고도 밝혔다.

특히 그간의 ‘갈등 상황’에 대한 팽팽한 신경전이 마지막 부분에 집약돼 있었다. “용산공원이 서울특별시 중심부에 조성되는 대형공원임을 감안하여 서울시와 적극적으로 협조해나갈 계획이며 향후 공식적인 협의채널을 통해 서울시에서 건설적인 제안과 건의가 개진되기를 희망한다.” 어절 단위로 끊어져 ‘굵게’ 표시를 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공식적인“, ”협의채널“, ”서울시“, ”건설적인“, ”제안“.

“서울시가 국토부를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서울시가 다 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실무선에서 협의하면 될 걸 가지고 계속 시장님이 나서서 기자회견을 하니 참. 이건 정치죠, 정치.” 국토부 관계자의 말이 이러하니 보도자료 마지막 부분에 방점이 찍힌 것 같다는 생각은 아마 옳을 것이다. 기자회견으로 갑작스럽게 입장 발표를 하지 말고, 실무진들 사이에서 협의할 수 있게 서울시 직인이 찍힌 공문을 보내라는 얘기였다.

서울시 부시장이 조성추진위원회에 포함된 상황에서 서울시의 목소리와 제안이 ‘공식적’으로 반영되지 않을 리 없다는 말이었다. 서울시는 이에 대해 “협의회에서 근본적 차원에서 재검토 의견을 내도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국토부와 완전히 정보가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확정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공식 서류로 특정 입장을 취하기보다 여론에 호소하려 한다”고 밝혔다. 정치라는 것이다.

●‘용산공원’으로 ‘정치’하면 안 되나요?

그렇다면 용산공원 라운드는 이 모든 것이 '정치‘의 영역임을 자인한 서울시의 패배인가? 이른바 ’대권 잠룡‘론이 거세지면서 박 시장의 행보가 나날이 주목받고 있는 지금, ’정치‘는 어쩌면 박 시장에게 씌울 수 있는 가장 편의적인 혐의일지 모른다.

그러나 특별법 기본 이념에도 "국민 여가휴가 공간 및 자연생태 공간 등으로 조성하여 국민이 다양한 혜택을 향유할 수 있게"라고 명문화 돼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의견의 반영‘이라는 의제를 걸고 나온 서울시의 ’정치‘가 정말 문제가 될까?

서울시는 입법부와 특별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요지는 용산공원 조성 계획의 주체를 ‘국토부’ 단독으로 한다는 내용과, 용산공원 조성의 근거가 ‘미군과의 협정’에 있다는 내용을 개정하는 것이다. ‘정치’는 띄워졌고, 이미 서울시는 ‘정치’를 하고 있다.

무더기 신축 건물을 짓겠다던 애초의 계획안은 여론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서울시는 국토부 이름을 빼겠다고 소매를 걷고 나섰다. 그렇다면 국토부는 “서울시가 정치한다”고 나무라기 전에 조금 더 잘 정치하는 법을 찾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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