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원작, 그리고 빵처럼 구워낸 복제품 (Certified Copy)

1.
얼마 전 국내 미술경매사 관계자를 만나 취재하던 중, 어렴풋이 알고 있던 개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프린트 베이커리(Print Bakery)’였다.

* 프린트 베이커리는 국내 대표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의 새로운 브랜드로 보다 많은 분들이 미술을 함께 즐기고 작품을 손쉽게 소장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마치 빵집에서 빵을 고르듯, 프린트 베이커리는 미술품 컬렉션을 보다 부담 없고 즐거운 일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 출처: 프린트베이커리 홈페이지(
http://www.printbakery.com/ )
프린트 베이커리 홈페이지 메인화면
시작한 지 3년이나 됐다고 하니, 아는 사람은 알만한 것일 테다. 나 역시 삼청동에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를 지날 때마다, 간판을 보고 ‘카피된 작품들을 파는 곳’이겠거니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베이커리라니, 그런 의미에선 효율적인 이름이다)

그림 구매의 문턱이 높은 갤러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작품을 쉽게 감상하고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지향한다고 한다. 국내 총 80여 명 작가의 280여 개 작품이 일종의 ‘상품’으로 소개됐다. 사업의 규모 뿐 아니라 수익도 해마다 증가 추세다.

쉽게 말해 원화를 디지털 판화형태로 제작하는 것이다. 고해상도로 사진 촬영한 뒤 압축해 아크릴 액자로 만드는 것인데, 물론 원화보다 저렴하다. 작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가격은 주로 그림의 크기(호수)에 따라 달라진다. 참여 작가의 명단을 보면 신진 작가부터 중견 작가, 유명 작가까지 다양하다. 김환기, 장욱진, 박서보 등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원화를 무한정 프린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마다 100~200개 정도로 제한돼 있다. 또, 복제품들은 모두 에디션 넘버(Edition Number)를 갖는다. 소위 ‘한정판(Limited Edition)’인 것이다. 뒷면에는 작가의 사인도 들어간다. 

뒤늦게 관련한 미술계 반응을 찾아보니 (내가 찾은 글만 놓고 봤을 땐) 업계의 저항이 생각보다 적었다. ‘상업적인 목적의 복제’ 이슈에 대한 글이 꽤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기사 중엔 카피 작품을 2년 내에 되팔면 80%를 돌려준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시장 가치를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을 영구적으로 위임 받아 찍고 또 찍는 그림이 아니니, 원화만큼은 아니더라도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한정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 원화(Original Painting) vs 프린트베이커리
프린트베이커리가 제공하는 '판화'는 오리지널의 또 다른 버전으로 높은 소장가치를 지닙니다.원화(Original Painting)는 세상에서 유일무이(Uniqueness)하지만, 판화(Limited Print Artwork)는 복제를 통해 멀티플(Multiple) 아트, 즉 복수의 미술품이 됩니다. ... 작품 당 한정된 수량으로 제작되어 희소성을 가지며, 원화에 비해 '합리적인' 금액대로 유명 작품이 '내 것'이 되는 것, 프린트베이커리가 지닌 가장 큰 매력입니다.
- 출처: 프린트베이커리 홈페이지(
http://www.printbakery.com/ )

회사 로비에 앉아 관계자에게 이런 설명을 듣는데, 머릿속에 한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몸은 로비에 있는데 정신은 아득하게 멀어져, 5년 전 봤던 그 영화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 (2010,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였다.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2.
영화는 극적이기보단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다. 영국의 한 중년 작가가 새로 펴낸 책의 강연 차 이탈리아 투스카니에 머문다. 강연을 들은 한 여성은 그의 팬이라며 하루 동안 시골 마을을 소개해주겠다고 자청하고, 두 사람은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 중 우연한 계기로 부부인 척 역할극을 하게 되는데, 점차 심상치 않은 현실이 되어 두 사람은 ‘진짜 부부’인 양 행동하게 되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며 혼란에 빠진다.

혼란에 빠지는 건 두 사람 뿐만이 아니다. 뒤로 갈수록 관객도 혼란스러워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처음부터 부부였는데 서로에게 이방인인 척 한 게 아닐까?’ 싶은 설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혼 15년 차를 연기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그들이, 실제 그만큼 같이 살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법한 대화를 한다. 실은 원래 부부였고, 오히려 거짓으로 '독자와 작가'의 역할극을 한 게 아닐까 헷갈리는 거다. 영화는 끝까지 두 사람이 실제 부부인지 아닌지 답을 주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이 쓴 책의 제목이 ‘COPIA CONFORME’이다. ‘보증받은 복제품’, 그리하여 ‘감쪽같은 복제품’ 인데 그러니까 영화의 원제 ‘Certified Copy’는 이 책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거다. (우리나라에선 ‘사랑을 카피하다’로 개봉했다) 두 사람이 여행 내내 논쟁을 벌이는 것도 원작의 고유성, 복제품의 가치를 따지는 일에 대한 것이다.(여자 주인공이 골동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한다) 결국 영화는 안팎으로 진짜와 복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 더. 우리 사는 현실을 영화가 모방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영화’의 관계 역시 원작과 복제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이 영화 초반, 자신의 강연에서 이와 관련해 의견을 밝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영화를 다시 보며 받아 적었다)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내 책의 부제인 ‘잘 만든 복제품(copy) 열 원본(originality) 안 부럽다’가 예술 애호가의 심기를 거슬렸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전적으로 제 잘못만은 아닙니다. 출판사에서 튀는 제목을 원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전문가도, 예술사학도도 아니고 이 분야에서 인정받은 사람도 아니죠. 제도예술의 일원도 아니고요.

다만 복제품을 통해 원본의 미에 접근할 수 있다면 다분한 가치가 있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예술에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제 글을 읽고 자아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원본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로마인이 모조 은장식을 팔던 시절부터요. 메디치가는 미켈란젤로에게 고대 유물의 복제를 의뢰한 경우도 있었죠. 원본보다 더 비싸게 팔려는 목적으로요.

따라서 원본과 복제품에 대한 고민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원본(originality)이라는 단어엔 긍정적인 속뜻이 많습니다. 독창적인(authentic), 진실한(genuine), 믿을 만한(reliable), 영구적인(lasting), 고유의 가치(intrinsic value) 등등. 어원 또한 흥미롭죠. 라틴어 ‘Oriri’는 ‘떠오르다’, ‘태어났다‘란 뜻이 있죠. 태어났다(birth)는 말과 연관성이 흥미로워요.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예술 작품의 복제는 인간의 생식(reproduction)에 대비할 수 있죠. 우리도 어차피 조상의 DNA의 복제품이니까요.”


3. 
영화 속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프린트 베이커리 역시 "원본의 미에 접근할 수 있다면 다분한 가치를 갖는" 조건부 예술이다. 물질만을 놓고 보았을 때, 누군가는 고해상도의 디지털 작업에 초점을 맞춰 ‘원본과 흡사하다’고 말할 테고, 또 누군가는 ‘압축 아크릴’이 살리지 못하는 원화의 질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논의를 아예 뛰어넘는 논의도 가능하다. 결국 감독이 말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던 것처럼 ‘카피가 실제 원화에 얼마만큼 다가갔는지’와 별개로, 카피를 보고도 원화 못지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동을 느꼈다면 자체로 가치를 갖는 거다. 두 사람이 (영화 속에서) 실제 부부이건 그것을 연기했건, 느끼는 감정만은 진실돼 보이는 것처럼.
프린트 베이커리 홈페이지 화면
혹자는 ‘모방은 원본에 대한 수동적 기록이 아니며 원본을 탁월하게 만들거나 원본보다 더 탁월해지는 생산적 마술에 가깝다.’고 했다. (씨네21 2011-05-26 '그 너머의 아름다움') 원화와 비교했을 때 플러스 알파 없이 단순 판화라는 점에선, 프린트 베이커리에 이 주장을 그대로 대입하긴 어렵다.

하지만 의미를 좀 더 확장하면, 이처럼 통제된 방식으로 카피를 생산하는 것이 적어도 기존의 원화와 작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은 명징하다. 향후 ‘생산적 마술’까지 될 수 있을 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1.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지난 7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가 대표작이다. 이란이 낳은 최고의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RIP.
고(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사진=BIFF 제공)
2. 여자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줄리엣 비노쉬이다. 이 영화로 2010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3. 프린트 베이커리의 제작 공정은 다음 영상에 잘 나와 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