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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치유 연극'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취재파일] '치유 연극'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대학로의 한 작은 극장 입구에선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관객을 맞이합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가장 먼저 외벽에 붙은 다양한 글귀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괜히 왔다 간다’, ‘드디어 편히 쉬다’, ‘몽땅 다 쓰고 가다’,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인생이 참 지루하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어요’,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추억을 돌이켜보면 항상 아름답다’, ‘내가 진작 몸이 아프다고 그랬잖아’, ‘우물쭈물 하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 ‘죽음이 아니라 삶이야말로 위대한 모험이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어떤 글들인지 대충 짐작이 가시나요?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묘비명이라고 합니다. 기지가 넘치는 표현부터 따뜻하고 진지한 표현까지, 글쓴이의 성향을 잘 드러내주는 글귀들입니다. 공연 관계자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에겐 어떤 묘비명이 가장 마음에 와 닿나요?”

이번 주 초 취재를 위해 관람한 연극 ‘내가 사는 세상’ 공연장의 외부는 이렇게 꾸며져 있습니다. 관객들은 묘비명으로 가득 찬 외벽을 지나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 화분을 하나씩 선물 받습니다. 작은 초록빛 다육 식물인데, 한 개씩 고르도록 요구 받습니다. 관계자는 말합니다. “예쁜 걸 고르지 말고 당신과 가장 닮은 것으로 골라주세요.”

이쯤 되면 도대체 무슨 연극일까 궁금하실 겁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과 한국연극치료협회, 중앙자살예방센터, 서울시교육청 등이 주최하고 후원하는 이 작품에는, ‘치유 연극’이라는 짧은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실제로 연극에 출연하는 5명의 연기자와 토론을 진행하는 진행자는 모두 상담심리사들입니다. 연극이 시작되면 이들은 학교 폭력과 따돌림, 군대 내 인권 유린, 가정 내 차별과 방임,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 등 살면서 한 번 쯤 겪게 되는 아픔과 상처를 무대 위에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빼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탄탄한 대본이 바탕이 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스타 하나 없고 화려한 무대 장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될수록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놀라운 광경은 무대가 아니라, 그 반대쪽 객석에서 벌어집니다.

이 뻔하고 단순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하나둘 훌쩍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객석이 눈물에 젖는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여성은 물론 남성까지, 어린 학생은 물론 중년의 관객까지, 전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느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습니다.

진행자가 등장해 객석의 참여를 유도하자 그들은 하나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나도 모른 척 했을 뿐 같은 상처가 있다, 극 중 인물들의 모습이 나와 내 가족을 닮았다, 살기 힘들다며 주변의 힘든 얘기에 귀를 막았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후회된다… 

상담사들은 관객을 무대로 불러내 소그룹을 지은 뒤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풀어놓게 합니다. 관객들이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하면 상담사들은 이걸 즉흥 연극으로 만들어내는데, 이 과정을 통해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재인식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입니다.

그 곳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수많은 관객들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참 힘들었구나. 그동안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다들 마르지 않는 눈물의 샘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구나.’ 생각이 듭니다.

이 극의 연출을 맡은 현미자 씨는 인사말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속 이런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슬픔에게 말을 주세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슬픔은 괴로워하는 가슴에게 찢어지라고 속삭인답니다.’

공연장의 불이 꺼질 땐 제작진은 물론 관객들까지 일시적이긴 하지만 깊은 유대감으로 뭉쳐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절망에서 다시 서게 하는 힘은 때론 생각지 못한 작은 감동과 공감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이 작은 연극을 올리는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 세상을 바꾸는 작은 감동…객석 울린 '참여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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