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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뇌전증·조현병…이름만 바꾸면 뭐합니까?

[취재파일] 뇌전증·조현병…이름만 바꾸면 뭐합니까?
최근 사석에서 만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들은 얘기다. 한 어머니가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다고 생각해 상담을 원한 것인데, 의사가 보기에 한 눈에 ‘조현병’(옛 정신분열증)이 의심됐고 진찰해보니 확실했다.

바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아들이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 어머니는 이후 다시 병원에 오지 않았다. 과연 그 아이는 지금 다른 어느 병원에서 다시 진단받고 잘 치료받고 있을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렇길 바라지만, 아닐 것 같다.
지난 5월 발생한 ‘강남 묻지마 살인’은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든 아니었든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했고,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추모 문화를 낳았다. 그러나 가해자가 앓고 있었던 조현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성찰도 없이 낙인 찍는 역할만을 했다.

학계에서는 국내에 조현병 환자가 50만 명 정도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실제로 한 번이라도 병원에 간 기록이 있는 조현병 환자는 2014년 기준 10만 명을 조금 넘었다. 환자의 80%가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조현병 환자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 찍는 사회분위기가 깊어지면 증세가 있어도 제대로 진단받고 치료하려는 이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조현병 환자의 범죄를 연구한 영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해자 대부분이 치료를 받지 않거나, 치료를 중단한 뒤 증세가 나빠졌을 때 범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국내 조현병 환자 5명 중 4명이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조현병 환자들이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단받고 꾸준히 치료받도록 해야 ‘강남 묻지마 살인’ 같은 비극이 재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낮아진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와는 정반대다. 정신분열증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는 이유로 이름을 조현병으로 바꿨지만, 인식이 개선되기는커녕 더 나빠졌을 뿐이다.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꾼 질환이 또 있다. 바로 ‘간질’이다. 최근 ‘해운대 교통 사고’로 인해 수많은 언론에 오르내린 ‘뇌전증’이 간질의 새로운 이름이다.
경찰이 사고 직후 가해 운전자가 뇌전증을 앓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며칠 동안 거의 모든 언론이 뇌전증으로 인한 의식 소실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기사를 썼다. 뇌전증 환자를 못 걸러내는 운전면허 규정은 질타당했고, 뇌전증 환자들이 운전대를 잡으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질 것처럼 불안감을 키우는 기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경찰도 정치인도 언론을 거들었다.

그런데 부산 경찰은 뒤늦게 가해 운전자가 뺑소니 치는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를 입수해, 이번 사건이 뇌전증과 연관이 없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사고 나흘 만인 지난 4일 공식 발표했다.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거나 발작을 일으켜서 사고를 낸 것이 아니라, 뺑소니를 내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참사가 빚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경찰은 대체 왜 충분한 수사를 하기도 전에 가해 운전자의 질병 정보를 공개해 뇌전증 환자들에게 낙인을 찍은 걸까.
 
대한뇌전증학회는 5일 국회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경찰이 성급하게 발표하고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뇌전증 환자들이 과도하게 매도된 것을 문제 삼고, 학회 차원에서도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학회의 보도자료에는 기자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꼭 기억해야 하는 내용이 많다. 부분적으로 발췌한다.
 
“이번 사고를 뇌전증 증상에 의한 것으로 가정했을 경우에도 과거 40~50년 동안 이렇게 큰 사고를 낸 경우는 처음으로, 뇌전증 자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환자가 약을 며칠 동안 먹지 않아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번 사고는 약을 제대로 먹지 않는 환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뇌전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회 제공 그래픽>
“일본,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뇌전증 환자의 교통사고 상대적 위험도는 70세 이상 고령군 또는 20대 젊은 연령대 운전자에 비해 낮다. 이번 사고로 뇌전증 환자들이 절대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의식소실을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질환 환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다. 특히 정치인과 언론은 사실과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해서 판단하고 행동해야지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대한뇌전증학회는 미국의 경우 뇌전증 환자라도 의사소견서를 받거나 3개월~1년의 무증상 기간 후에는 운전을 허락하고 있다고 밝히며, 기존에 면허를 취득한 뇌전증 환자들의 적성검사 시 별도로 안전교육을 철저하게 받을 수 있도록 경찰과 협의하겠다는 입장을 함께 내놓았다.
 
뇌전증이 블랙박스 덕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뇌전증뿐 아니라 치매, 중증 당뇨병 환자는 물론, 70세 이상 고령자들의 운전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고 금지할 것인지 깊이있는 논의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다만 특정 질환에 대한 낙인 찍기를 계속해서 더 많은 질환을 앓는 수많은 환자들이 병원에 가는 것을 꺼리게 만들 것이 아니라, 환자와 의료 전문가, 시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찾길 바란다.

그리고 조현병 환자를 비롯해 더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더 효과적인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돕는 것은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정부의 책임이다. 

▶ <대한뇌전증학회 대국민 보도 자료>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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