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걱정 없이 살던 백씨부부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집 앞으로 호남고속철도가 들어오면서 부터입니다. 이들 부부는 자식농사를 짓기 위해 소를 키우고, 자라 양식장을 20년째 운영해 왔습니다. 그런데 고속철도가 집 앞 양식장에서 불과 40미터 떨어진 지점을 통과하게 된 것입니다.
큰일났다싶어 노선공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철도시설관리공단을 찾아가 집과 양식장 이전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되돌아온 건 부정적인 대답 뿐 이었습니다. 철길이 양식장과 집을 직접 관통하지 않는 한 이전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이 그렇게 돼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소리만 낡아빠진 레코드판 돌아가듯 들려왔습니다.
그렇다고 평화롭게 살던 삶의 터전을 한 순간에 접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부부의 걱정은 날로 커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돼 터널을 뚫고, 교각을 세우는 건설현장 소음에 키우던 소와 자라의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군청과 국가기관을 찾아가 이전 대책을 호소했지만, 철도시설관리공단은 양식장 피해에 대한 보상은 안해주고, 그놈의 법 타령만 늘어놓으면서 이전요구에는 꿈쩍도 안했습니다.
지난해 3월10일 KTX가 시범운행에 들어가면서 양식장 자라피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속에서 사는 자라는 날씨가 추워지면 보통11월초 쯤 겨울잠에 들어가 이듬해 4월 중순 까지 수중 모래 속 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KTX 시범운행이 시작된 뒤부터 이상하게도 모래 속에서 동면을 해야 할 자라가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급기야 하루에 20여 마리씩 죽어갔습니다. 죽어서 물위로 떠오른 자라는 대개 3년 이상 된 성체들이어서 손해가 막심했습니다. 부화한지 1~2년된 것들은 상대적으로 소음과 진동 스트레스에 강한지 피해가 덜했습니다. 이렇게 죽어나간 자라는 3월부터 9월까지 6개월간 무려 3천5백여 마리나 됐습니다.
조정위원회는 지난 5월 KTX 소음과 진동을 측정한 결과 주간 59.2 데시벨, 야간 53.2 데시벨이었고, 진동은 주간 47 데시벨, 야간은 43 데시벨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측정치는 철도교통 소음관리 기준인 주간 75 데시벨, 야간 65 데시벨, 진동 기준 주간 70 데시벨, 야간 65 데시벨 이내에 들어가는 수치였습니다. 철도공단은 이런 소음 기준과 측정치를 들어 KTX운행이 양식장 자라 폐사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위원회의 고속철 소음, 진동 배상결정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2천8년부터 지난해 까지 9건의 소음, 진동피해 신청이 들어왔는데 모두 공사장에서 일으키는 소음과 진동이었습니다. 9건 가운데 2건만 기각되고 나머지 7건은 피해가 인정돼 배상결정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배상결정은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합니다. 소음과 진동피해가 일회성이 아니고 지금도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피해신청을 한 지난해 9월 이후에도 자라의 폐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백씨 부부는 2차 피해신청을 위해 지금도 날마다 죽어나오는 자라숫자를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기고 있습니다. 성가시고 못 할 일이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권리를 주장할 수 없어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백씨 부부는 이번 배상결정을 토대로 항구적 대책인 양식장 이전요구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이들 부부는 힘든 싸움을 이어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국회의원과 정부부처를 찾아가 법률개정을 요구한다는 계획입니다. 법타령만 하는 철도공단에 맞서기 위해섭니다. 그러는 사이 또 얼마나 많은 자라가 죽어나갈지 모릅니다.
자라도 살고 백씨 부부의 근심꺼리도 해결할 방도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철도공단과 관계부처가 귀를 열고 민원을 풀어보겠다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