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미국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제 생각엔 미국 기층 국민들의 분노와 비주류 바람입니다. 국민의 분노를 증오와 분열로 증폭시켜 표를 결집한 공화당의 트럼프가 있습니다. 또, 트럼프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분노와 상실감을 정치 참여로 표출하라고 호소한 민주당의 샌더스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결국 거대 정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꿰찼고, 또 한 사람은 나름 선전했지만 대통령 후보에 이르진 못했습니다.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고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지만 두 사람 모두 미국 기성 정치권을 뒤흔든, 미국 사회의 내재적 모순을 공론의 장으로 들고 나온 아웃사이더, 비주류였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합니다.
트럼프에게 밀린 공화당 주자들이 한 명 한 명 중도 하차한 것과는 달리, 샌더스는 아직 경선 포기 선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선거 캠페인 자체가 정치 혁명의 과정이라며 전당대회까지 승부를 끝내지 않을 기세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승부는 사실상 끝났는데도 말이죠. 고집 센 70대 노인의 몽니일까요? 경선만 놓고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샌더스 바람이 음으로 양으로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그가 힘줘 말한 ‘정치 혁명’이란 구호가 허투루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샌더스가 ‘자본주의 탐욕의 상징’이라고 비판했던 월스트리트 금융권에 대한 견제 장치도 들어갔습니다. 금융기관 중역들의 지역 연방준비은행 이사 겸직과 고액의 퇴직금을 금지했습니다. 월가와 워싱턴 정치권을 오가며 한편으로 돈을 벌고 한편으론 거대 금융의 이익을 대변하는 ‘회전문 인사’도 막아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역외 조세회피 기업의 탈세에 대한 철저한 조사도 촉구했습니다. 월가와의 전쟁을 선포한 샌더스의 공약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렇다고 입당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비주류 정치인의 주장이 200년 미국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해온 거대 정당의 방향을 단숨에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겠죠. 민주당은 지난 30년 간 이어진 자유 무역이 미국 중산층을 보호하는데 실패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오바마 정부가 추진 중인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TPP)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존재한다면서 결론을 유보했습니다. 전국민 의료보험과 공립대학 학비 무료 같은 샌더스 공약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민주당 정강 정책이 한 발 왼쪽으로 이동했고, 이는 샌더스의 힘이라는 데 이견을 다는 미국 언론은 거의 없습니다. 샌더스도 새 정강 정책이 공개된 뒤 트위터를 통해 “미국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공약을 담고 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습니다.
사실 민주당 정강 정책이 이렇게 ‘좌로 1보’ 방향을 튼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민주당의 새로운 정강 정책을 만드는 정강정책위원회는 15명의 위원으로 구성하는데, 이 중 5명을 샌더스가 지명했습니다. 나머지 10명 중 6명은 힐러리 클린턴이, 4명은 데비 슐츠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이 지명했습니다. 샌더스 측이 1/3의 지분을 갖고 정강정책 작성 작업에 참여한 셈이죠. 예전에는 전국위원회 위원장이 위원 15명 모두를 지명해 왔는데, 민주당이 구성 방식을 바꾼 겁니다. 민주당 주류 세력들이 샌더스의 정치 철학과 주장에 마음 깊이 감복한 나머지 “민주당을 바꿔주세요”라며 자발적으로 위원 지명을 맡긴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실 새로운 정강정책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꼭 따라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공약에 100% 반영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위원회가 작성한 초안이 이달 말 전당대회 전에 수정될 수도 있고 대의원들의 추인 투표도 남아 있습니다. ‘선언적 의미’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정치 참여가 진리라는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참여의 가장 쉬운 방법은 투표고, 특정 인물이든 특정 철학이든 어떤 계기를 통해 뭉친 집단이 표 결집의 가능성이 있을 때 정치권은 반드시 그것에 반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샌더스 현상의 가장 큰 교훈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