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리우 취재파일⑭] 금메달을 포기한 '아름다운 바보'…이집트 유도 선수 라슈완

[리우 취재파일⑭] 금메달을 포기한 '아름다운 바보'…이집트 유도 선수 라슈완
▲ 레슬링 선수 김인섭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레슬링의 김인섭 선수 기억나시나요? 김인섭은 당시 우리 선수단에서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습니다. 그레코로만형 58kg급에서 1998년과 1999년 세계 선수권을 2연패했고, 41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최강자로 군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선에서 손가락과 갈비뼈를 다쳤습니다. 그래도 진통 주사를 맞고 투혼을 발휘하며 어렵게 결승까지 올랐습니다.

결승에서 만난 불가리아의 나자리안은 패시브 기회에서 김인섭의 부상 부위를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김인섭은 순식간에 10점을 내주고 폴로 졌습니다. 경기 후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매트 위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그의 모습, 그리고 다음과 같은 눈물의 인터뷰가 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쳤거든요.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늘이 저를 은메달밖에 안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김인섭의 아픈 곳을 무자비하게 공격한 나자리안이 얄미웠지만, 냉혹한 승부의 세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승부의 세계에서 나자리안의 행위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죠. 이를 비난할 수도 없고요.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줘 페어플레이의 대명사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선수가 있습니다.

● 금메달을 포기한 ‘아름다운 바보’…이집트 유도 선수 라슈완
일본 유도 영웅 야마시타 야스히로 (사진=Alchetron 홈페이지 캡처)
1984년 LA 올림픽 유도 남자 무제한급 결승. 일본의 유도 영웅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 랴슈완이 맞붙었습니다. 세계선수권 4회 우승에 1977년부터 1985년까지 20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던 야마시타는 지금까지도 일본 유도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LA 올림픽에서 2회전 경기 도중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경기를 이어간 야마시타는 준결승에서 프랑스의 콜롬보로부터 부상 부위인 오른쪽 다리를 공격 받고 먼저 효과를 빼앗겼습니다.

이후 누르기 한판으로 역전승을 거두긴 했지만 그의 종아리 부상은 더 악화됐습니다.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습니다. 결승전에 출전하기 위해 매트에 오를 때 그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천신만고 끝에 결승에 오른 그와 달리 결승 상대였던 이집트의 라슈완은 결승에 오르기 전까지 모든 경기를 한판으로 끝냈습니다.

야마시타가 제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고 해도 오른쪽 다리를 못 쓰는 상황에서 전 경기 한판승으로 한껏 기세가 오른 라슈완을 이기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라슈완으로서도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국 이집트에도 36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해 국민적인 영웅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야마시타가 다친 오른쪽 다리만 집중 공략하면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야마시타의 오른쪽 다리 대신 왼쪽 다리를 걸려고 하다 되치기를 당해 매트 위에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야마시타의 굳히기 기술에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경기 시작 1분 5초 만에 야마시타의 주특기인 누르기에 한판으로 맥없이 졌습니다. 금메달의 영광을 눈앞에 두고 사실상 경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의 경기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에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야마시타가 오른쪽 종아리를 다쳤다는 사실을 알았나요?” 라슈완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전력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 야마시타가 오른쪽 다리를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를 공격하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이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야마시타의 부상 때문에 이겼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감동적인 장면은 시상식에서 연출됐습니다. 야마시타가 다리가 아파 시상대에 오르지 못하자 라슈완이 부축해서 맨 윗자리까지 올려주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에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금메달은 놓쳤지만 라슈완은 이후 값진 상으로 보상받았습니다.

유네스코와 국제 페어플레이위원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했습니다. 국제유도연맹도 메이저대회 우승 경력이 없는 그를 이례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렸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라슈완은 명예(honour)와 존중(respect), 진실성(integrity)이라는 유도의 핵심 가치를 실천했다.”
모하메드 알리 라슈완의 모습 (사진=Alchetron 홈페이지 캡처)
라슈완은 LA 올림픽 이후 1985년과 1987년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1992년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현재는 유도 국제 심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당시의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또 스포츠가 마치 전쟁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상대를 존중하는 본래의 스포츠 정신을 되찾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현재 지도자로 활동 중인 야마시타 야스히로 (사진=Alchetron 홈페이지 캡처)
그를 누르고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야마시타는 1985년 203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운 뒤 매트를 떠나 지금까지 일본 유도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어떻게든 이용해 이겨야 하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선택을 한 라슈완은 승리보다 더 숭고한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지금까지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1등’ 못지않은 ‘아름다운 2등’으로.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