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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취재파일 17] 체조 여왕 코마네치 왜 1점?

[리우 취재파일 17] 체조 여왕 코마네치 왜 1점?
▲ 올가 코르부트(좌), 나디아 코마네치(우) (사진=게티이미지/이매진스)

<삼국지연의>를 보면 오나라의 주유가 죽기 전에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았는가?”라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유명한 “기생유(旣生瑜) 하생량(何生亮)”입니다. 주유도 일세를 풍미한 대단한 인물이지만 끝내 촉나라의 제갈량을 벽을 넘지 못한데서 나온 말입니다.
 
1970년대 세계 여자 기계체조에 주유와 제갈량 같은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옛 소련의 올가 코르부트와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입니다. 코르부트의 원래 별명은 ‘민스크의 참새’였습니다. 민스크는 그녀의 모국 벨라루스의 수도입니다. 참새처럼 가벼운 몸놀림과 가냘픈 외모 때문에 이런 닉네임이 생겼습니다.
'민크스의 참새'라는 별명을 가진 옛 소련의 체조선수 올가 코르부트 (사진=게티이미지/이매진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코르부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파격적인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평균대 연기가 압권이었습니다. 사상 최초로 평균대에서 뒤로 공중제비돌기를 시도해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그냥 서 있기도 불안한 폭 10cm의 평균대에서 그녀는 마치 널찍한 대청마루에서 노는 듯이 아주 편하게 아찔한 묘기를 마음껏 과시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코르부트의 별명은 ‘뮌헨의 달링’(Darling Of Munich)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코르부트를 넘을 선수는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4년 만에 열린 바로 다음 대회, 즉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온 14살의 소녀는 인류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연기를 구사했습니다.
 
특히 이단 평행봉 종목에서 창의적이고 다양하고 기발하고 완벽한 기술을 펼쳤습니다. 기술과 기술 사이의 이음매, 즉 단절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도 다이내믹하게 움직였습니다. 팔을 X자로 꺾고, 뒤집고, 회전하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 작은 새가 이 둥지, 저 둥지로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것을 연상케 했습니다. 그것은 체조가 아니라 곡예에 가까웠습니다.
 
키 153cm, 체중 39kg의 소녀가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도 나비가 앉듯이 사뿐했습니다. 그녀의 연기에 체조장을 꽉 채운 관중보다 심판이 더 놀랐습니다. 하지만 정작 놀랄 일은 조금 뒤에 벌어졌습니다. 루마니아 소녀의 경기 점수가 전광판에 1.00으로 표시됐기 때문입니다.
9.99점까지 표시할 수 있었던 당시 10점을 받은 루마니아 대표선수 나디아 코마네치 (사진=게티이미지/이매진스)
10점 만점에 고작 1.00점. 관중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루마니아 체조 코치는 어처구니없는 점수에 항의하기 위해 벌떡 일어섰습니다. 바로 그때 심사위원 한 명이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외쳤습니다. “1점이 아니라 10점입니다. 10점 만점!”

체조에서 그 어떤 인간도 10점 만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전까지 체조경기장의 점수 전광판은 9.99까지만 표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10.00점은 전광판에 부득이 1.00으로 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1명의 심판도 예외 없이 모두 10점 만점을 주었습니다. 세계 체조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소녀가 바로 역대 최고의 체조선수로 평가되는 나디아 코마네치입니다.

코마네치는 이 대회에서 개인종합, 평균대, 2단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따내 3관왕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활약으로 조국 루마니아는 체조 단체전에서 최강 소련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코마네치가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연기를 펼치자 세계는 열광했습니다. 미국의 <타임>지는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세계적 슈퍼스타가 된 코마네치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다시 출전했습니다.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에서 살이 조금은 찐 숙녀로 바뀌었지만 결과는 좋았습니다. 평균대와 마루 운동에서 금메달 2개를 따냈고 개인 종합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2차례의 올림픽에서 모두 5개의 금메달, 3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후 그녀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 이상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의 핍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28살이던 1989년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혁명으로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순탄치 않은 망명 생활을 하다 1996년에 미국의 유명 체조 스타인 버트 코너와 자신의 조국 루마니아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코마네치는 올해 55살이지만 그녀 인생의 정점은 단연 14살 때였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사람들은 ‘뮌헨의 달링’을 서서히 잊고 ‘몬트리올의 요정’을 기억하게 됐습니다. 코르부트는 뮌헨올림픽에서 평균 9.8점 정도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매우 높은 점수임에 분명했지만 사상 초유의 만점을 받은 코마네치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단어가 없지만 만약 코마네치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사상 가장 인상적인 체조여왕은 단연 올가 코르부트였을 겁니다. 이 때문에 코마네치보다 6살 많은 코르부트는 지금도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늘은 왜 코르부트를 낳고 또 코마네치를 낳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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