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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The Greatest' 알리, 신화가 된 천재 복서

[취재파일] 'The Greatest' 알리, 신화가 된 천재 복서
20세기 최고 복서이자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평가되는 무하마드 알리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포츠계는 물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반기문 UN 사무총장 등 세계 각계 인사들의 애도와 추모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오는 10일 그의 고향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열릴 예정입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가장 유명한 스포츠맨임에 틀림없지만 복싱 테크닉에서 그는 ‘천재 복서’ 슈거레이 레너드에 미치지 못합니다. 펀치의 강도에서는 조지 포먼이나 마이크 타이슨보다 뒤집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전성기 시절에 가졌던 ‘압도적 1인자’란 이미지도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하마드 알리는 이런 슈퍼스타를 능가하는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른 스타들에는 없는 ‘섬씽 스페셜(특별한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이슨과 플로이드 메이웨더에게서 복싱을 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요? 마이클 조던에게서 농구를, 타이거 우즈에게서 골프를 떼어놓으면 뭐가 남을까요? 조던에게는 야구 선수를 했던 이미지, 우즈에게는 ‘불륜’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될까요?

이와 달리 알리는 링 안은 물론 링 밖에서도 위대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3가지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상대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켄 노턴 등 당대의 명복서들과 숱한 명승부를 펼치며 세계 복싱 역사의 황금기를 구가했습니다. 지금도 전설의 장면으로 남아 있는 1974년 ‘킨샤샤의 기적’, 이듬해 ‘스릴러 인 마닐라’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사실 이보다 알리를 가장 돋보이게 한 것은 링 밖에서의 싸움입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금의환향했지만, 단지 ‘검둥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백인 갱들의 위협을 받자 소중한 금메달을 미련 없이 강에 던져버렸습니다. 캐시어스 클레이란 원래 이름이 ‘노예 이름’이라 생각해 주저없이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습니다.

그는 모든 차별과 불평등과의 일전을 불사했습니다. 흑인으로 인종 차별에 맞섰고, 이슬람 신자로 종교 차별에 대항했습니다. 베트남전 참전 거부로 백인 주류 사회와 맞서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한 채 3년 이상 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한 것입니다.

거침없는 언변과 민권 운동으로 미국 비주류 사회의 대표를 자임한 알리는 각종 자선사업까지 활발하게 펼쳐 흑인들의 진정한 우상이 됐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알리는 세상을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세상은 더 좋아졌다. 그는 옳은 일을 위해 싸운 사람“이라고 추모했습니다.

1980년 화려한 선수생활을 마친 알리는 불행히도 4년 만에 ‘파킨슨병’에 걸렸습니다. 이후 무려 32년이나 병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손을 떨면서까지 성화대에 불을 붙여 진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알리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그는 진정한 월드 스타였습니다.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서 조깅을 하기도 했고, 미국의 적국인 쿠바와 이라크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 사담 후세인과 친한 친구처럼 포옹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어떤 스포츠맨도 상상하기 힘든 환영을 받은 것입니다. 평화의 메신저로서 그는 미국인을 떠나 진정한 세계시민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복싱은 '3Ch'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전(Challenge)을 멈추지 않았고, 끊임없이 변화(Change)를 추구했고, 언제나 챔피언(Champion)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64년 당시 챔피언 소니 리스튼과의 대결, 1974년 당시 챔피언 조지 포먼과의 대결에서 그의 승산은 10%였지만 ‘로프 어 도프’를 비롯한 기발한 작전으로 드라마틱한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알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Legacy)은 ‘3Con’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는 매 경기를 앞두고 몇 라운드에 이길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알리가 근거 있는 자신감(Confidence)을 갖고 링에 올랐다는 증거입니다.

링 밖에서는 그는 신념(Conviction)과 확신에 찬 인물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한창 전성기 시절에 선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에서도 '굴종‘을 원하는 미국 주류 사회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일관성(Consistency)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100%는 아니지만 말과 행동이 서로 부합하는 ‘언행일치’를 위해 스스로를 연마하며 채찍질했습니다. 오랜 친구인 빌 클린전 전 대통령은 “알리는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책임을 졌고, 살아가면서 절대 멈추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운동선수로서 타고난 기량 외에 빼어난 말재주로 ‘스포츠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렸고, 쇼맨십, 유머까지 겸비해 스포츠를 넘어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은 되지 않겠다”, “불가능,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를 비롯해 수많은 주옥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스타를 넘어 진정한 영웅 반열에 오른 그를 상징하는 표현은 이것 하나로 족합니다. 알리가 늘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기도 합니다. “THE GREATEST OF ALL TIME"(나는 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생존하고 있을 때 이미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린 무하마드 알리는 링에 오를 때마다 그의 트렁크(경기용 팬츠)에 새겨져 있던 'EVERLAST'란 단어처럼 영원히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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