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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변화를 위한 작은 움직임, 연극 '미모되니깐'

5월의 마지막 금요일, 서울 대학로에 조금 특별한 연극이 한 편 올려졌습니다. 단 두 차례의 공연이었습니다. 당초 저녁 공연만 예고됐지만, 이 공연의 좌석이 모두 나가자 주최 측은 낮 공연을 한 차례 추가했습니다. 티켓은 모두 무료고, 객석이 150석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극장에서 공연이었지만, 주최 측은 고무돼 있었습니다.

유명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탄탄한 원작이 있는 공연도 아닙니다. 제목은 ‘미모되니깐‘. 모두 8명의 배우가 출연하는데, 그 중 3명은 전문 배우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마추어 배우들이 무대에 선 이유는 그들의 미모(美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미혼모(未婚母)이기 때문입니다. 미혼모의 얘기를 다룬 연극에 진짜 미혼모들이 배우로 나선 겁니다.

이 극을 기획한 단체는 미혼모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연극놀이 및 교육치료 워크숍’이란 걸 진행하다 여기서 나온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기로 했다고 합니다. 공연에 배우로 참여할 엄마들도 모집했죠. 그 결과 지난해 11월 첫 번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번에 시즌2 공연에 이르렀습니다.
극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비록 계획하고 준비한 임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뱃속의 아이를 지울 수는 없기에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심하는 여성들. 하지만 아이를 선택하는 순간, 이 여성들의 삶에는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마음대로 낳은 애니깐 너 혼자 알아서 하라“며 아이 아빠는 책임을 회피하고, “난 너 같은 딸 없다“며 부모마저 등을 돌립니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 때문에 취업은 번번이 좌절됩니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취업을 하면 회사에선 가족관계증명서를 요구하고, 아이의 존재를 아는 회사에서는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엄마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엄마들은 한탄합니다. “일 안하면 세금으로 애 키운다고 욕하고, 일 좀 하겠다고 하면 애 있다고 안 된다고 하고…”

무엇보다 힘든 건 아이가 입는 상처입니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은 아이는 한참을 울다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아빠가 없으면 나쁜 거야?” 그 순간 어린이집의 다른 엄마는 전화를 해 “어린이집 좀 옮겨주면 안될까? 자기가 다른 엄마들 마음 이해해서 조용히 옮겨줘”라고 말합니다.  

워크숍 과정에서 나온 엄마들의 이야기로 극을 구성한 까닭에 극의 에피소드는 100% 실화라고 합니다. 친정어머니가 한 말을 친정아버지의 대사로 바꾸거나, 어린이집의 다른 아이 엄마가 집에 찾아와 한 이야기를 전화상으로 한 이야기로 바꾸는 정도의, 약간의 수정만 했을 뿐이라고 주최 측은 설명했습니다.

주최 측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극을 보는 내내 ‘설마 저렇기까지야…’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낙태와 입양을 마다하고 출산과 양육을 선택한 대가로 이 엄마들이 겪어야했던 일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임신의 순간에는 잘못된 결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선택한 엄마들인데, 당사자와 그 자녀가 아닌 어느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걸까요?

공연을 보며 화도 났는데, 그건 아이 아빠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모습 때문이라기보다는, 미혼모 부모의 이기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힌 모습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민낯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아이가 있는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쑥덕대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미혼모의 자녀를 놀리고 차별하는 아이들에게 따끔하게 지적하지 않는 어린이집 교사와 그런 아이들의 편견을 만들고 부추기는 부모들 때문에 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적인 행위가 ‘공공연히’ 일어나는 사회라면, 그런 행위에 상식을 가진 대중의 분노와 사회적 제재가 뒤따르지 않는 사회라면, 이를 막기 위한 적절한 교육이 행해지지 않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를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미혼모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펼쳐 보인 그들의 삶을 보고 있자니, 우리 사회가 여전히 그런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지면 극의 연출자 겸 진행자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관객을 극에 참여시키는 건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해법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분노와 안타까움을 드러냈고, 적지 않은 이들은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이런저런 대안을 제시해보고, 사회적 편견과 시스템 개선을 위해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어색하고 무대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 작은 연극에 객석의 호응이 이토록 뜨거울 수 있었던 건 그 안에 담긴 진실과 진심 때문일 겁니다. 주최 측은 제목 속 ‘미모’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아직 온전한 엄마가 아닌(未母)’, 동시에 다른 평범한 엄마들처럼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름다운 엄마(美母)’란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사회적 편견을 없애는 일은 제도를 바꾸는 일보다 길고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연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겠죠.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용기를 내 무대에 선 미혼의 엄마들이 공연을 통해 힘을 얻어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은 용기들이 모여 우리 사회에 거대하고 도도한 변화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 ‘미혼모’라는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politically incorrect)는 지적도 있지만, 공연에서 사용되고 있고 현실에서도 범용되는 표현인 관계로 그대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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