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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슬로건으로 본 미국 대선 : 간결의 미학, 애매모호의 상술

[월드리포트] 슬로건으로 본 미국 대선 : 간결의 미학, 애매모호의 상술
각종 선거에서 모든 정당과 후보들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마디로 압축해 표현할 단어나 문장을 고민합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지금 무엇을 주장하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하려 하는가’를 표현하는 단 한 마디, 우리가 선거 때마다 보고 듣는 ‘슬로건’입니다.

슬로건의 목적은 결국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유권자 개개인이 갖고 있는 한 표를 특정 후보에게 줄 마음이 생기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슬로건이란 어떤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슬로건의 요건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강점을 한껏 드러내면서 동시에 상대 후보를 꼬집어야 하고, 자신의 지지층을 결속시키면서 동시에 거부감을 확산시켜선 안 되며, 현재 유권자들이 가장 가려워하는 부분을 긁어줘야 합니다. 좋은 슬로건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선거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선거의 프레임을 선점하는 것이죠.

한 후보가 프레임을 선점하면 경쟁 후보들의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무시하거나 대응하거나. 무시하기에는 바람이 거세고, 대응하자니 왠지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 그 후보는 고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 민주당의 선거 슬로건 ‘못 살겠다 갈아보자’와 자유당의 대응 구호 ‘갈아봤자 별 수 없다’는 프레임 선점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국에서도 슬로건 전쟁이 한창입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슬로건은 공화당 트럼프 후보의 ‘위대한 미국의 재건(Make America Great Again)'입니다. 가장 쉬운 단어와 화법으로 좌충우돌 막말을 날리는 트럼프 유세 연설의 마지막은 항상 ’위대한 미국의 재건‘, 이 말로 끝납니다.

사실 이 슬로건의 원조는 따로 있습니다. 1980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먼저 쓴 슬로건입니다. 미국 국민들에게 인기 있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레이건 전 대통령과 잘나가던 80년대 시절을 그리워하는 유권자들을 겨냥한 향수 마케팅입니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인 저소득 저학력 백인 유권자들에게는 ‘위대한 미국을 현 민주당 정권이 망쳐놓았다’는 메시지로도 들릴 듯합니다. ‘Great(위대한)'로 자신을 높이고 ‘Again(다시)’으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전략이죠. 
이에 맞서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슬로건은 ‘함께 하면 강하다(Stronger Together)’입니다. 방점은 ‘Together(함께)’에 찍혀 있는 듯합니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통합을 이룰 후보, 미국 사회의 계층 간 격차를 완화할 후보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또, 당내 경쟁 주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지지자들에겐 당내 경쟁의 대세가 기운만큼 이제 나에게 오라는 메시지가 될 수 있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무슬림의 입국을 금지시키자는 트럼프를 ‘분열과 증오의 후보’로 깎아 내리는 의미도 됩니다. 클린턴의 이전 슬로건은 ‘나는 그녀를 지지한다(I'm With Her)’, 여성 후보임을 강조한 슬로건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슬로건이 더 효과적으로 보이나요? 슬로건으로만 보자면 저는 트럼프의 슬로건이 훨씬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Great Again’이라는 두 단어가 담아내는 함축적 의미가 ‘Stronger Together’보다 많은데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질까?’라는 미국 중하위층 유권자의 박탈감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트럼프는 과거 미국의 무엇이 위대했고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위대함을 재건할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유권자들에게 ‘저 사람이 하면 뭔가 다르겠지’하는 기대감을 부풀릴 뿐입니다.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들에게 변화의 종착점을 ‘위대함’으로 얼버무리고 각자에 맞게 ‘위대함’을 해석하도록 맡기는 식이죠. 뭐 그런 면에선 클린턴의 슬로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애매모호함의 상술인 거죠.
 
미국의 역대 선거 슬로건을 보면 간결함과 애매모호함이 대부분 함께 했습니다. 미국이 사랑하는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의 1960년 대선 슬로건인 ‘위대함을 위한 시간(A Time for Greatness 1960)’, 1976년 대선에 나선 지미 카터 당시 민주당 후보의 ‘변화를 이끌 지도자(A Leader, For a Change)’, 1980년 대선 레이건 공화당 후보의 ‘위대한 미국의 재건(Make America Great Again),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Are You Better Off Than You Were Four Years Ago?)’, 1992년 대선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국민을 위해, 변화를 위해(For People, For A Change),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2000년 조시 부시 공화당 후보의 ‘인간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 2008년 오바마 민주당 후보의 ‘변화, 우리는 할 수 있다(Change. Yes We Can)’ 등이 대표적인 슬로건들입니다.

앞서 보신 바와 같이 ‘위대함’과 ‘변화’, ‘국민을 위해’ 등은 슬로건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용어입니다. 유권자마다 알아서 해석하기 때문에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정색하고 반대할 명분도 없고요. 현실에 대한 불만도 적절하게 녹여 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선의 슬로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새로운 대한민국’, 2007년 대선 이명박 후보의 ‘국민 성공시대’, 2012년 대선 박근혜 후보의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 공통점이 보이십니까? 간결하고 쉽게, 누구나 좋아할, ‘애매모호’한 표현들입니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희소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SBS에서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으로 분한 탤런트 김명민 씨도 극중에서 이렇게 외치죠. “정치란 나누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온갖 화려한 말들이 춤추지만 결국 핵심은 ‘국민으로부터 걷은 세금을 어디에 쓸 것인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가의 물리력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로 집약됩니다.

슬로건은 이런 부분에 대한 유권자들의 꼼꼼한 추궁을 피해가는 화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애매모호한 슬로건으로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들에게 뭐라 하기는 힘듭니다.

가장 많은 표를 얻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이니까요. 결국 슬로건도, 정책도 옥석을 구별해내는 것은 유권자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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