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인공지능은 지능이 아니다" 스티븐 핑커-최재천의 통섭적 대화

이주형 기자 joolee@sbs.co.kr

작성 2016.05.27 15:02 수정 2017.01.04 11: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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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인공지능은 지능이 아니다" 스티븐 핑커-최재천의 통섭적 대화
서울 DDP에서 만난 두 과학자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 반갑게 맞았다. 54년생 동갑내기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하버드 박사 출신이라는 동문 의식이 한몫했을까.

겉모습은 딴판이었다. 한 사람은 금발의 장발, 또 한 사람은 흑발의 단발이었다. 한 사람은 블루셔츠에 넥타이를 맨 전형적인 서양 복식을 하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화이트 차이나칼라 셔츠에 개량 한복을 입었다.  

대담을 들으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낀 건 나이나 학벌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지적 세계'에 대한 존중과 이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인지 과학자로서 또 한 사람은 생물학자로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진화론에 굳건히 젖줄을 대고 있는 세계였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빈 서판' 등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 석학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와 '개미 제국의 발견', '통섭의 식탁' 등 수많은 대중과학서를 쓴 스타 과학자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 만났다.  

서울디지털포럼 참석차 처음으로 한국에 온 스티븐 핑커 교수를 맞아 최재천 교수는 최근 자신이 인터뷰한 '총,균,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같은 석학들을 인용하며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핑커 교수는 곤란하게 느낄 수 있는 질문에 서슴없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때로는 너무도 통념에 반하는 대답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 답변은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보게도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인류사에 있어서 폭력의 문제부터 자원의 고갈,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성, 정신적 잔인성, 인공지능(AI)까지 폭넓게 넘나들었고, 듣는 사람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할만큼 논쟁적이었다. 지난해 출간된 스티븐 핑커의 묵직한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다루고 있는 '폭력의 역사'에서부터 대담은 시작됐다."인류사에 있어 폭력이 감소한다는 주장은 성급한 결론 아닌가요?"

최재천: 교수님은 책에서, 어쩌면 우리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어요. 교수님의 주장에 100% 동의합니다. 저 또한 얼마나 오래됐는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20년간 강의에서 계속 해 온 이야기가 있거든요.

“여러분이 밤에 자고 있는데, 옆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목을 자르고 마을 전체를 불지르고 여자들을 데려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진정 이 시대보다 더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해 왔기 때문에 교수님의 책을 보았을 때 와 드디어 이런 주장이 책으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당신의 의견에 완벽하게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비평을 해 보도록 할게요. 책에서 안록산의 난을 예로 들며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라고 언급하셨더군요. 제가 중국사 연구자들 몇몇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 모두가 난이 일어나기 전 약 100년 정도의 시기를 아마도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간주하더군요. 심지어 여자 황제가 탄생하기도 했죠. 중국 역사상 여제가 세상을 지배한 유일한 시대였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았죠.

한 가지 사례만 가지고 당신을 괴롭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이것을 조금만 더 확장해 볼까 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교수님께서 예로 든 자료는 사실 대부분 지난 50년 동안의 것이죠. 교수님께서는 좀 전에 책 출간 이후 지난 5년간의 자료를 더 모았다고 했습니다. 이 책 제목에는 '인간의 본성', '우리의 본성'이란 게 들어 있습니다. 이 제목은 제게 곧바로 아, 이 책은 진화에 대한 이야기구나 라는 인상을 줬습니다.

그러나 50년 혹은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은 말이죠, 우리 본성의 진화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교수님께서 책에서 내린 결론은 너무 성급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폭력의 감소나 평화의 지속 같은 것은 백 년 정도의 시간이면 일어날 수 있죠.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무시무시한 폭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핑커: 우선 정리를 하죠. 먼저 저는 책에서 우리가 생물학적인 의미의 진화를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능은 하죠. 가장 단순한 가정은 현재 우리의 뇌가 1천년, 2천년, 심지어 1만년 전 인류의 뇌와 동일하다는 것이고, 인류의 변화는 인간의 본성이 복잡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죠. 폭력이 일어나는 동기가 다양하듯이, 절제, 공감, 평화, 협력을 추구하는 동기 또한 다양합니다.

현재 변한 것은 인간의 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뇌의 어떤 영역들이 더 많이 활성화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감소와 같은 일부 변화들은 고작 70년 전에 시작됐고, 저는 이러한 감소가 인간의 생물학적인 변화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규범, 논거, 제도의 변화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교수님께서는 역사가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것이라 언급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거대한 우연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른데 사람들이 혼동하죠. 만약 주기가 존재한다면, 마치 시계를 보듯이 100년간 전쟁이 없었으니 이제 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겠군,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전쟁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기가 존재하고 불시에 전쟁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역사가 그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결코 제로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감소할 수 있고, 다음 전쟁이 50년 후가 아니라 100년 후 또는 500년 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또는 가능성이 감소함으로써 전쟁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지만 실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고 볼 수도 있고요. 또한 인간이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은 몇몇 폭력의 범주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모든 문명은 신의 분노를 잠재워서 자연재해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곤 했습니다. 이제 인간 제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합법적 노예제도 또한 모든 문명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어느 국가에서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국가간 전쟁도 노예 시장이나 처녀를 화산에 던지는 풍습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내전은 그 성격이 좀 다릅니다. 192개의 국가가 존재하는데, 이는 192개의 주체가 전쟁은 어리석으니 더 이상 하지 말자고 결정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반면에 세상에 게릴라 집단과 해방자를 자칭하는 집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따져보면 수천, 수만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내전들을 목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 간 전쟁을 그만큼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셋째로 각각 다른 시기에 일어난 폭력을 어떻게 측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책에서 지난 70년 동안 전쟁이 감소한 것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총 6개 장 중에서 하나의 장에서만 다루었죠. 시기에 따라 폭력의 유형과 데이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책에서 살인과 같은 폭력 범죄들도 다루었는데, 살인은 거의 대부분의 시기에 전쟁보다 더 큰 폭력의 근원이었습니다. 현재는 아마 5~10배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보다 살인으로 인해 죽습니다. 전쟁은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는 방법은 아닙니다. 또한 살인의 양상은 국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한국의 살인율은 어느 시기부터 데이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군요. 유럽의 경우 서기 12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이후 현격히 떨어지죠. ‘제도’들 또한 제 책의 한 장을 할애해 다루고 있습니다.

노예제뿐 아니라 화형, 거열형, 맹수와 싸우는 스포츠, 채무자 수감, 이단자를 산 채로 화형시키는 것과 같은 공개적 고문 처형과 같은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서양에서는 이런 제도들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시대마다 다른 유형의 폭력이 감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언급한 부족 전쟁과 연계되는 장도 있는데, 부족 전쟁은 수렵채집 집단에서 매우 흔했습니다. 침략, 불화(반목), 여성의 납치, 새벽의 급습, 매복 등 그들이 주로 행했던 폭력은 오늘날의 전쟁이나 살인에 의한 사망률보다 훨씬 더 높은 사망률을 야기했는데, 이는 수렵채집 집단이 더 강력한 정부의 통제 아래 있게 될 때마다 감소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안록산의 난과 관련해서,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전쟁에 의한 사망을 집계한 연속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은데, 이는 어느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안록산의 난을 언급한 것은 전세기 동안 중국이 폭력적이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안록산의 난 시기에 폭등했던 폭력을 그 시기 전후해서 어떻게 평균화하느냐에 따라 전세기에 걸친 중국의 폭력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되겠죠.

제가 안록산의 난을 언급한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가장 폭력적인 사건들이 존재했다는 이유로 20세기가 가장 폭력적인 시기였음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세계 인구 대비 사망률을 따진다면 안록산의 난이 훨씬 더 심할 수 있어요.

저는 전쟁 중 사망과 관련된 데이터에 있어 두 가지의 데이터 집합을 활용합니다. 그중 하나는 1946년부터 시작하는 데이터로,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이야기한 내용은 이 데이터와 관련된 것이죠. 하지만 거대한 힘들 사이의 전쟁만을 다루는 다른 데이터 집합이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 군대 간의 전쟁에 관한 데이터죠. 그리고 전쟁에 관한 통계에 따르면, 모든 전쟁을 합쳤을 때의 총 사망자 수의 대부분이 거대한 힘들이 결부된 전쟁으로 설명됩니다.

거대한 힘이 결부된 전쟁들은 놓칠 수가 없고, 역사가들이 반드시 기록합니다. 그래서 만약 교수님이 거대한 힘들 사이의 전쟁에만 한정해서 본다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00년 이후의 숫자에 주목하면 전쟁의 횟수는 감소합니다. 전쟁의 기간도 감소했습니다. 전쟁의 격렬함, 즉 국가당 연간 사망자수는 1945년까지 상승하지만 이 또한 감소했습니다.

따라서 1,500년도부터 1950년경까지의 전쟁과 관련된 경향은 기복을 보이는데, 서로 다른 두 경향(전쟁 횟수와 기간, 그리고 전쟁의 격렬함)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945년 이후에는 두 경향 모두 감소하죠. 한국의 경우,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이 맞붙은 마지막 전쟁을 경험했고, 1953년 한국전쟁 이후 두 개의 거대한 힘은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 같은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환상과 같은 거예요.”

 
최재천: 지난주에 UCLA의 Jared Diamond 교수가 이런 포럼과 유사한 종류의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제가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반복적으로 몇 번이나 우리는 앞으로 3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33년 안에 우리의 자원 조건, 자연 자원은 끔찍한 상황에 처하는데, 고갈 상태가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 간의 불평등 문제가 끔찍한 수준이 되어 인간 사회는 매우 불안정해질 것이기에 우리는 이에 대해 뭔가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33년 안에 엄청난 경제적 불균등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폭력을 목도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핑커: 저는 그것과 관련된 어떤 증거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 자원은 고갈되고 있지 않습니다. 석유 자원은 절대 고갈되지 않을 거예요. 몇 달 전 애틀랜틱(Atlantic)의 커버스토리에 나왔던 얘기죠.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자원이 점점 희소해질수록 가격은 오르고, 이는 기업들이 그 자원을 더 발굴하도록 하는 인센티브가 됩니다.  실제로 더 찾아내죠. 또한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은 아껴 쓰고 재활용하며 다른 자원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자원이 고갈될 염려는 없다고 봅니다.

유일한 예외의 가능성은 물인데, 물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에너지를 활용하는 더 좋은 방법을 강구한다면 바닷물의 담수화가 가능할 것이고, 바닷물은 고갈될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원이 중요해진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요. 모든 현실 만족적인 상품(complacent commodity)의 가격은 낮아졌습니다. 가격이 낮아졌다는 의미는 즉 상품이 더 늘었다는 뜻이죠.

우리가 가진 모든 상품과 자원의 양은 매장량으로 인해 증가합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원의 희소성이 커질수록 자원을 발견하고 보유하려는 인센티브가 커질 테니까요. 또한 전쟁은 자원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매우 심각한 오해죠. 지난 100년간 일어난 모든 전쟁들의 목록을 검토하고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살펴보면, 그중 자원과 관련된 전쟁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전쟁은 이데올로기, 안전, 부당함 혹은 지각된 부당함, 잘못을 바로잡거나 복수하기 위해 일어났으며, 자원 때문에 일어난 전쟁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중동의 경우를 보면, 그들이 싸우지 않는 하나의 이유가 물이죠. 그들이 싸워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물일 텐데 말이죠. 물은 마셔야죠.

최재천: 불공정성,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경제적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될 것 같은데요.

핑커: 음, 무엇보다도 전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지 않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급부상은 사실 1인당 자본 불평등(per capita inequality)의 격차를 줄여 주고 있으니까요. 국가 내에서 보자면, 빌 게이츠가 나보다 돈이 많다는 사실과 같은 이유로 내전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빌이 나보다 돈이 10배, 100배, 혹은 1,000배 많다고 해서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불평등은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불평등보다 더 큰 문제는 빈곤입니다. 그런데 빈곤의 정도는 완화되고 있어요. 전지구적 빈곤율은 10%로 떨어졌고, UN의 지속가능개발목표는 2030년까지 전세계 극빈율을 제로로 낮추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국과 미국처럼 산업화된 나라에서조차 비록 불평등은 늘고 있으나 그것이 사람들이 더욱더 가난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부자들이 더 부유하게 되는 속도가 가난한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전쟁은 불평등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최재천: 가장 가난한 자들이 어느 정도 살아갈 만한 수준의 가난에 머물 수 있다면 불평등으로 인한 갈등은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긴가요?

핑커: 대부분의 갈등들은 어차피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지 않아요. 단지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가난한 자들이 잘살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아마 러시아 혁명을 떠올리실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러시아 혁명이 가난한 자들에 의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 같은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환상과 같은 거예요.

“한강의 수상…물리적 폭력과 별개로 ‘정신적 잔인성’은 심해지고 있지 않나?”
 

최재천: 어제 한국에는 큰 화제거리가 있었어요. 한국의 젊은 여성 소설가인 한강이라는 작가가 맨부커 상을 수상한 거죠. 이건 우리에게 엄청난 소식이었어요. 우리의 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니까요. 당신의 부인도 상당한 명망을 가진 소설가죠. 그래서 당신도 소설과 같은 문학의 힘을 알겠네요.

상을 받은 소설은 “채식주의자”란 제목으로,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궁극적으로 나무가 되기를 원해요.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순전히 우연하게 채식주의자가 되죠. 만약 당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채식주의자이다 라고 한다면 당신을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도대체 당신 문제가 뭔가요? 고기를 먹는 것이 그렇게 혐오스러운가요? 라고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 유사한 몇몇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책입니다.

왜 타인들을 괴롭히죠? 나는 나만의 신념 같은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정신적 학대나 정신적 잔인함을 다룹니다.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그녀의 책을 빠르게 읽으면서 생각했죠. 당신 책 속의 수많은 데이터들은 물리적 잔인성에 대한 것인가요?

핑커: 네 물리적 폭력 맞습니다.

최재천: 정신적 잔인성은 어떤가요? 물리적 잔인성만큼 감소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나에겐 데이터가 없어서 그저 한 번 언급해 봅니다. 우리의 언어가 매우 정교해지고 사회가 매우 복잡해 지면서, 지난 수년 동안 정신적 잔인성이 줄어들기보다 사실상 늘어나지는 않았나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질문해 봅니다.

핑커: 저는 정신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동일시하지 않는데, 둘은 완전히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죠. 사람이 죽으면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당신을 모욕한다면, 당신은 박차고 그 자리를 벗어나 여전히 당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죠. 나는 물리적 폭력을 대신해 무례와 모욕이 증가해 왔다는 증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8, 19세기 소설을 봐도 서로를 모욕하고 경시하고 억누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현상에 대해 나는 우리가 점점 잔인한 상호작용에 민감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한국에도 미국 대학가의 현상, 마이크로어그레션에 상응하는 현상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네요. 단어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내포하죠.

일단 마이크로어그레션은 물리적 측면의 공격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쳤는데 세게 치지는 않았다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마이크로어그레션은 소수 인종이나 여성들이 모욕적이라고 느낄만한 발언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만약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재능이 있는지에 따라 성공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말을 한다면, 이는 마이크로어그레션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인종적 소수자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을 내포하게 돼 버리거든요.

이제는 이런 경우도 공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공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이 이전 세대들이 무시했거나 그냥 참고 넘어갔을 법한 문제들에 대해 정신적인 도움을 찾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재천: 방금 우리가 타인의 감정에 점점 더 예민해지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Donald Trump는 무슨 경우인가요? 새로 당선된 필리핀 대통령은요? 이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대놓고 사람들을 모욕하고 그것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죠. 이것도 어떤 새로운 경향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시스템 내에서 뭔가 붕괴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핑커: 이런 이야기는 시기상조인 것 같아요. 필리핀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미국에서 여론조사를 보면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죠. 그러나 만약 당신이 제기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분명 수많은 경향들이 역전된다고 볼 수는 있겠네요.

최재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핑커: 저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공 지능은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해요.”
 
최재천: 약 한 달 전에, “사피엔스”라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책을 쓴 헤브루 대학의 교수인 유발 하라리가 한국에 와서 1주 이상, 거의 10일을 머물다 갔습니다.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 같은 것들을 하고 돌아갔는데, 오늘과 같은 자리에 함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한국 대중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핵심적인 큰 메시지는 책에도 나와 있듯이 인류가 사라질 것이며 그것도 매우 빨리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수십 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는 언급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더니 그렇게 빨리는 아니라도 100년 또는 200년 안에는 그 시기가 도래한다고 얘기했어요. 그 이유에 대해 물었죠. 그는 인공 지능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인공 지능이 우리를 밀어낼 거라고 하더군요. 인지심리학자로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핑커: 아니에요, 파멸에 대한 예측은 항상 있었죠. 교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제가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요. 오래 전 하버드 대학에서, 어쩌면 당신도 같은 곳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컴퓨터과학과의 유명한 교수인 조셉 와이젠바움이 대학원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자리에 왔습니다. 하버드에 입학하는 우리를 위한 축사를 했죠.

그때 그는 우리에게 음성 인식 기술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CIA가 그 기술을 이용해서 우리의 모든 대화를 도청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문제 해결 기술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국방부에서 베트콩을 어떻게 살해할지 계획하는데 이용할 테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확신합니다, 내 마음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2,000년이 도래했을 때에는 이미 여러분들은 모두 죽은 목숨일 테니까요”라고 말했죠. 그런데 2016년 현재 우리는 아직도 살아 있죠.

저는 인류의 종말에 대한 예측들은 과장된다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인공 지능에 대한 예측도 완전히 빗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인공 지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인간의 심리와 인간의 지능을 인공 지능에 투사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수컷 영장류의 진화된 특성인 ‘지배’를 지능(intelligence)의 본질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똑똑한 기계들을 만들면, 어느 순간 그 기계들이 모든 것을 인수하려고 할 거라 여기죠. 우리는 그저 그 기계들에게 방해가 될 뿐이니까, 오늘날의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듯이 기계가 우리를 대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건 지능(intelligence)이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는 다윈의 자연선택과 성선택의 결과로 이렇게 영리한 뇌를 갖게 되었고, 권력의 추구와 같은 특정한 특성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로를 따라 운전하도록 고안된 인공 기기가,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지 않는 한은 어느 날 갑자기 각성해서 “운전에 신물이 나”라고 말하며 “인육을 먹고 싶어” 또는 “인간들을 다 제거해 버릴 거야”라고 나올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높은 지능을 가졌지만 지배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는 예를 알고 있죠. 바로 여성입니다. 여성은 완벽하게 지능적이지만 우두머리 수컷의 심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또 다른 시나리오도 얘기해 봅시다. 우연히 페이퍼클립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진 인공 지능이 페이퍼클립을 만드는 기술이 너무 뛰어나져서 더 많은 페이퍼클립을 만들기 위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공지능을 파괴한다는 시나리오 말입니다. 이러한 가정은 페이퍼클립을 만들기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완벽한 탁월함과, 페이퍼클립을 만드는 것 이외의 목표들도 프로그래밍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완벽한 어리석음의 결합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그런 한가지 목표만을 추구하는 기계를 만들지는 않거든요. 자동차, 요리법, 테이블 톱과 같은 여타의 모든 생산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또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에 관해 경험하면서, 안전 장치 또한 개발하게 됩니다. 반면에 인공 지능이 봉기를 일으킬 정도로 자발적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진화된 유기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성(intelligence)과 일반적인 지능(intelligence)을 혼동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최재천: 나 역시 하라리에게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만약 인공 지능에게 자연 선택이 일어난다면, 몇몇 인공 지능은 이 자연 선택 과정에서 살아남아, 머나먼 훗날에, 어쩌면 우리와 경쟁할 수도 있겠다고요. 그러나 결국 우리가 설계했고, 또 인공 지능이라는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공 지능이 우리를 이기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핑커: 동의합니다.

최재천: 유발 하라리가 오기 몇 주 전에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극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글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한국의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 간의 굉장한 경기를 봤었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인공 지능이 우리의 최고 바둑기사를 이기겠어'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러나 기계는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강한 것으로 판명 났고, 한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당신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해해야만 할 것이, 현재 이런 경험을 하고 난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핑커: 이미 이전에 체스 대회에서 세계를 제패한 프로그램이 있었고, 또 그 이전에는 체커스 게임에서 그 누구나 이길 수 있었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 가지 특정한 일을 하도록 설계된 기계가 인간보다 그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컴퓨터가 인간보다 산술 계산을 잘하게 됐을 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죠.

그러나 인간을 해치거나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게 된다는 경우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또한 기계가 원래 만들어진 목적이란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알파고는 바둑을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며 이 세상 끝까지 죽어라 바둑만 둘 테니까요. 어느 날 문득 “바둑이 지겨워졌어, 사람들을 죽여 봐야겠어”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최재천: 50년 후는 어떨까요? 아마 많은 수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이 존재할 것이고, 여기저기 로봇들도 존재할 텐데, 그때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핑커: 예측하기가 많이 주저되는 것이,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기술에 대한 예측에 얼마나 서툰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거든요. 신문에 나온 가장 최근의 트렌드를 바탕으로 너무 쉽게 50년 후를 추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그런 건 옳지 않아요.

단적인 예로 현대의 비행기 여행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점에서 50년 전에 비해 오히려 더 열악해졌죠. 첫 대륙횡단 제트기가 발명됐을 때만 해도… 오늘날 비행기 여행은 전혀 빨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공항의 보안검사 때문에 더 느려졌습니다. 더 편안하지도 않은 것이 비행기 안에 더 많은 사람을 우겨 넣기에 바쁘기 때문이죠. 이것은 발전을 멈춰 버린 기술의 한 예죠. 비슷하게 유인 우주선을 생각해 보면 1972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44년이 지난 오늘 어느 누구도 달 너머로 가보지 못했죠.

한편으론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기술의 발전도 있습니다. 15년 전만해도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의 부상에 관해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텔레비전 쇼의 결말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했죠. 원하기만 한다면 메뉴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왕자의 게임’ 결말을 이렇게, 저렇게, 아니면 또 다른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메뉴 말입니다. 대화형 텔레비전이란 것, 결코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기술 발전은 양방향이에요. 50년 후에 대한 예측은 결국 예측일 뿐이고, 나는 그것이 틀릴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최재천: 당신은 예측하기를 원치 않는군요.

핑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의 예측이 틀릴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다윈주의의 자연선택이란 아이디어는 생물과 무생물을 연결한다”

최재천: 내가 2009년에 당신의 연구실을 방문한 것 기억하세요?

핑커: 네, 기억합니다.

최재천: 그때 우리는 왜 다윈이 중요한가에 대해 이야기했었죠. 나는 그 질문을 여러 다윈주의 학자들에게 물어봤어요. 당신의 대답은 뭐랄까… 무척 특이했어요. 당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연선택, 다윈주의의 자연선택이란 아이디어는, 생물과 무생물을 연결한다’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무생물의 세계를 자연 선택이라는 다윈의 사고와 연결 짓지 않았기 때문에 꽤 흥미로웠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인공 지능, 기계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상기가 되네요. 우리가 무생물의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래서 당신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 봤습니다. 당신은 이미 뭔가를 예견했던 걸까요?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이러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은 필연적이었을까요?

이미 이것에 대해 얘기했지만, 당신이 생물 세계와 무생물 세계, 그리고 그 간극을 이어주는 다리를 언급했을 때 무슨 의미였나요?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이 논의가 더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공 지능, 기계와 같은 무생물 개체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논하게 됐으니까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요?

핑커: 한편에는 돌, 강, 모래와 같은 무생물,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개구리, 백합, 인간과 같은 생물체가 존재하는데, 이 둘의 가장 확연한 분리는 두 번째 범주인 생명체가 삶을 유지하고 엔트로피를 막기 위해 에너지를 활용한다는 것이죠. 그들은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고, 대사작용을 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그것들(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매우 다르다고 보았고, 그래서 신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짠~하고 살아있는 것들을 창조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죠. 돌과 개구리는 서로 너무나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다윈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줬어요.

모든 것은 복제자(replicator), 즉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자신의 복제품이 또 다른 복제품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활용하는, 조금의 물질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다윈은 일단 그러한 과정이 시작되면, 더 높은 복제율로 이어지는 오류를 가진 복제품들이 수 세대에 걸친 복제의 과정에서 모집단의 주류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줬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복제품을 세상의 행위자로서 만들기 위해 작용하는 시스템, 즉 생물체를 보게 됩니다.

진화생물학을 설명하는 학자이자 무신론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다윈이 등장하기 전에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다윈이 아니라면 생물체라는 존재는 설명 불가능했으니까요. 다윈은 우리로 하여금 지적으로 일관된 무신론자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하면, 오늘날의 로봇이나 인공 지능은 우리의 확장 표현형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그들은 우리의 의복이나 집, 혹은 비버댐이나 벌통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최재천: 그럼, 당신은 인공 지능이나 로봇 같은 것들을 무생물이라 보지 않는 거네요?

핑커: 그것들을 우리의 일부라고 부를 수… 네 맞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표현형(phenotype)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최재천: 우리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 같네요.

교수님은 책 “마음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서 제시한 ‘귀로 듣는 치즈 케익’ 개념은 교수님을 우리 대부분과 동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전공이 같잖아요. 대부분은 음악의 진보를 성 선택 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나타나 그것이 아니라면서, 음악은 단순한 부산물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처는 음악가인데 음악 역사의 발전 등등에 관해 강연하곤 합니다. 아주 가끔 저도 그녀의 세미나 강사로 초청되어, 음악이 어디에서 기원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죠. 그때마다 항상 저는 당신의 개념을 소개하는데,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치즈 케익과 달리 음악은 항상 우리와 함께했죠, 안 그래요? 현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하기 이전에도 음악은 존재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Rob Brooks였나요? 그가 최근 책에서 ‘귀로 듣는 치즈 케익’이라는 교수님의 개념 전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너무나 오랫동안 있어 왔고 치즈 케익이나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오래 존재해왔기 때문이죠.

광적인 음악 애호가들이 한국에는 많습니다. 그들이 교수님의 이야기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의 입장은 여전합니까?  

핑커: 교수님은 음악이 다윈주의적 적응 과정에 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적응(adaptation)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측면에서 저 역시 교수님과 같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비판가들이 때로 말하죠, 당신네 다윈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적응적(adaptive)이라고 얘기한다고, 또 그것이 순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누군가가 적응적 목적(adaptive purpose)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하면 분명 다윈주의자는 적응적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적응적이 아니라면 진화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그런 순환 논리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모든 개별적인 특성을 살펴보아야 하며, 왜 그 특성이 실제로 재생산을 확대해 나가는 데 기여하는지를 보여주는 공학적 분석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화심리학에 대한 비판가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교수님이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적응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만약 아니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믿어버리는 순환적 사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로 다른 이론들에 대해 (기준을) 적용하고는 있지만, 교수님과 제가 같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경우에는, 우리와 오래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여전히 적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적응이 아닌 부산물 또한 우리와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음악, 그것도 기악의 경우 7만 년 전 혹은 10만 년 전 아프리카로 거슬러 올라가는 증거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더 최근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재천: 아마 유럽에서는 약 3만 년 전일 겁니다.

핑커: 3만 년 전 유럽이라고 해도 음악이 인류의 존재 전반에 걸쳐 생물 종인 우리와 함께 해 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발명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노래하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노래하기는 부산물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단지 악기를 만들거나 치즈 케익을 만드는 것보다 전제조건들이 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치즈 케익은 최소한 농경 문화가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음악과 관련해, 저는 여전히 왜 리듬과 멜로디를 생산하는 능력이 생존 자손의 수를 증가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논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성선택 이론은 합당하지 않다고 보는데, 그 이론은 믹 재거의 진화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음악의 진화에 대한 이론일 수 없습니다. 99.99%의 음악가들이 믹 재거는 아닙니다. 대부분 많은 팬들을 거느리지 않죠. 그들은 여가 시간에 10살 짜리에게 트럼본을 가르치는 사람처럼 그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음악이 이들의 성적인 매력을 딱히 높여 주지는 않습니다.

음악 진화에 대한 다른 이론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언급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음악이 생물학적 적응이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음악에 존엄성, 또는 특별함, 또는 가치를 추가로 부여해 준다고 생각해서인데, 이 또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 것은 적응이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은 반드시 적응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문자 언어가 적응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죠. 너무 최근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학습으로 자연스럽게 늘지도 않습니다. 오직 소수의 문화에만 문자 언어가 있었고 또 다른 문화로까지 전파됐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적응이 아닙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인류가 이룩한 가장 아름다운 성과들 중의 하나입니다. 문학, 시, 법, 과학적 이론, 서신, 이 모두가 생물학적 의미에서 적응의 산물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적응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는 생물학자가 이야기하는 적응이 아닙니다.

반면에 적응이라고 볼 수 있으나 매우 달갑지 않은 것들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보복, 대학살, 강간과 같은 것들을 적응으로 설명하는 우수한 다윈주의적 논거들이 존재하지만, 이들 모두 근절시키고 싶은 것들입니다. 저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첫째, 생물학적 의미에서 적응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바람직하다는 보장이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로, 어떤 것이 적응인지를 판별하기 위한 엄중한 기준이 필요하고, 개인적으로 음악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최재천: 최근 당신은 “센스 오브 스타일(sense of style)”이라는 책을 썼죠. 그런데 영어로 글을 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엘리먼트 오브 스타일(the elements of style)”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 책이 생각나던데, 혹시 그 책을 대체하고 싶은 것인가요? 아… 이건 그냥 농담입니다.

어쨌든 한편으로는 언어학자가 영어 글쓰기에 대한 책을 쓴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반면에 당신은 왜 굳이 이런 책을 썼을까요? 그리고선 생각했죠. 에디 라이트도 소설가이고 스트렁크도 영문학 교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글은 어떻게 써야 하며 영어라는 언어를 구사하는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언어학자가 책을 쓰지 못할 이유가 있겠어요? 그러다 또 생각했죠. 잘못된 문장과 표현들을 읽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해 졌음이 틀림없다라고 말입니다. 나도 한국어에 있어서 그렇거든요. 이 이유가 맞나요?

핑커: 강간, 종족학살, 세계대전, 대학살에 대한 책을 쓰고 났더니, 분리 부정사처럼 좀 논란이 되는 주제로 전환하고 싶었습니다.

최재천: 지금 분리 부정사가 이 책의 주제보다 논란이 된다는 건가요? 알겠습니다.  

핑커: 네, 농담 좀 해봤습니다. 사실 글쓰기와 문법의 정교한 측면들에 있어 사람들이 실제로 격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제가 가진 두 개의 전문적인 관심사를 결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언어 심리학입니다.

문장이 쉽게 읽히거나, 또는 기억에 부담을 주도록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문장이 이해하기에 분명하고 쉽거나, 또는 혼란스럽도록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언어의 규칙들은 어떻게 작용할까? 문장을 문법적, 또는 비문법적으로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교수가 비문법적이라고 지적하는데, 정작 저는 그 문장에서 아무런 하자도 찾지 못할 때, 누가 옳은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이들은 모두 언어, 그리고 언어 연구에 관한 이슈들입니다.

동시에 대부분의 학자들과는 다르게 저는 학술 저널에만 기고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대중을 위한 책도 쓰면서 영역을 넘나듭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교수로서 습득한 많은 나쁜 습관들을 잊어야 했습니다. 저널에 기고하기 위해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과학 논문을 쓰던 것에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으로의 전환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쁜 글쓰기와 좋은 글쓰기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는데, 이러한 고민이 언어의 작용에 대한 저의 관심사들과 만난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은 언어심리학자이면서 동시에 폭넓은 독자층에 다가가기를 좋아하는 저에게 좋은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재천: 저는 신문에서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라고 하는 칼럼을 하나 쓰고 있습니다. 딱 2 주전에 365번째 칼럼을 썼어요.

핑커: 오, 축하합니다.

최재천: 주간 칼럼이니까, 지난 7년간 그 칼럼을 써왔다는 뜻이죠. 거기서 저는 제가 이 짧은 신문칼럼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칼럼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충분히 이른 시점, 즉 데드라인 3, 4일 전에 쓰는 것이라고요. 그러고 나서는 소리 내서 읽기 시작합니다. 아마 50번 이상은 읽을 거에요. 그리고 계속 수정해나가죠.

핑커: 맞아요, 맞아요.

최재천: 잘못된 표현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저의 글은 저의 아들보다도 더 소중하고 위험하다고나 할까요. 적어도 제 아들은 난 최재천의 아들입니다, 이름표를 달고 돌아다니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글에는 제 이름이 남습니다. 제가 죽고 나서도 여전히 존재할 거에요. 그래서 완벽하지 않은 글을 세상에 내보내도 싶지 않습니다. 짧은 에세이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죠. 잘 하고 있는 건가요?

핑커: 그럼요. 제가 글을 쓰는 방식도 같아요. 사람들마다 서로 방식이 다른데, 신문 칼럼니스트의 경우에 앉아서 뚝딱뚝딱 타이핑 하고 보내면 끝, 곧바로 게재해 버리는 칼럼니스트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이 맞지 않고, 당신도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저는 교정을 반복, 또 반복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가 내용을 제대로 쓰고, 주장을 논리적으로 개진하고, 사실 확인을 명확하게 하면서, 동시에 명확하고 짧고 쉽게 읽히도록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주제가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글쓰기에 주의를 기울일 차례인데, 최대한 좋은 글을 써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의 경우 오로지 글쓰기만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 여러 번 원고를 고치는 과정을 거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최재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한국을 방문해 주시고, 또 이 모든 흥미로운 이슈들에 대해 어떻게 사고할지를 알려주기 위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핑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 대담의 핵심 동영상은 소셜 동영상뉴스 서비스인 비디오머그 페이스북 페이지와 SBS홈페이지, 네이버TV캐스트, 다음TV팟 채널을 통해서 그리고 오디오는 팟캐스트 골라듣는 뉴스룸의 <목동살롱>을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스티븐 핑커는 누구?

1954년 캐나다 몬트리올 출생. 맥길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1979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실험 실리학으로 박사 학위 취득. MIT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지금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 인간의 마음과 언어, 본성에 대한 연구와 대중적인 책으로 세계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심리학자이자 인지 과학자. '단어와 규칙',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등의 저작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