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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박사학위? 1천5백만 원만 내"

[취재파일] "박사학위? 1천5백만 원만 내"

전병남 기자 nam@sbs.co.kr

작성 2016.05.25 10:58 수정 2016.05.25 11:1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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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이 있습니다. 캠퍼스가 없는 대신 온라인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사이버 대학 형태인 거죠. 이 대학에 들어가면 짧은 시간 내 학사학위를 딸 수 있고, 석사 학위, 박사학위도 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 돈이 듭니다. 학사 학위는 7백만~8백만 원, 석사 학위는 8백만~1천만 원, 박사 학위는 1천5백만 원 정도입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을 위해 학사+석사 과정, 석사+박사 과정 같은 패키지 상품도 있습니다. 바쁜 학생은 6개월 만에 석·박사 학위 취득도 가능합니다. 주로 동양학을 가르치지만 전공이 120개가 되어서 원하는 학문은 대부분 배울 수 있습니다. 3년 가까이 '학위장사'를 해오다 최근 경찰에 적발된 한 미인가 사이버대학의 이야기입니다.

● 가짜대학 만들어 학위 팔아…4억 넘게 챙겨

64세 김 모 씨는 지난 2012년 한 대학을 세웠습니다. 본교는 사이판에 세우고 한국엔 분교를 설립하는 형태였습니다. 학교의 총장은 자신이었고, 전처와 자녀 등 6명이 학교 이사진으로 참여했습니다. 일가족이 모여 대학을 세운 겁니다.

교수진도 90여명이나 채용해 홈페이지에 사진을 걸었습니다(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교수진 중 절반은 자신이 이 학교의 교수가 됐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리곤 학생을 모집해 종합대학과 대학원을 운영했습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김 씨가 세운 ‘학교’는 사실 국내법에 의하면 학교가 아닙니다. 김 씨는 미국에 신고하고 학교를 만들었는데, 이것만으로는 국내에서 학생을 모집해 학사일정을 운영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 대학에서 주는 학위증도 쓸모없는 종이 조각일 뿐입니다.

하지만 김씨는 "우리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면 국내 공·사립대학, 대학원은 물론 세계 어느 대학으로도 편입학 할 수 있다"며 학생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무속인, 승려, 어린이집 원장, 현역 군 장교 등 150여 명이 ‘쉽게 학위를 딸 수 있다’는 말에 꿰여 줄줄이 입학 신청서를 냈습니다.

김 씨는 만학도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돈을 챙겼습니다. 등록금만 내면 끝인 줄 알았던 학생들은 교재비, 논문 작성비, 학위수여식 등의 명목으로 계속 돈을 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68명, 피해 금액은 4억 원이 넘습니다. 학생들이 낸 돈은 대부분 학교의 사무총장을 맡은 전처(前妻)의 통장으로 흘러간 뒤 대부분 현금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사건은 이 학교 졸업생들이 이상한 낌새를 채며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일반 대학에 편입학을 의뢰했다 거절당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않고도 수천만 원을 냈다는 이유로 박사학위를 거머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23일, 김 씨의 학위장사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김 씨는 "당장은 등록된 국내 사이버대학이 아니지만 앞으로 등록을 받으려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은 대학을 설립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대학 등록 인가를 받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김 씨는 "국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며 버텼지만, 홈페이지에 이같은 내용을 홍보한 사실이 확인돼 사기 혐의로 입건됐습니다. ● '학벌 컴플렉스' 가진 사람들 노려

이번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은 평생 못 배운 서러움을 가슴으로 삭이며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도 박사가 될 수 있다"며 접근했으니, 얼마나 매혹적인 제안이었을까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61살 신 모 씨는 대표적인 피해자였습니다.

신 씨는 평생 장사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짧은 가방끈'은 늘 감추고 싶은 약점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장사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 씨를 알게됐고, 박사학위를 받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신 씨는 쉽게 흔들렸습니다. 결국 2천만 원을 내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학위를 보고 비웃음을 치면서 신 씨는 '뭔가 잘못됐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게 자신이 교수님이자 총장님으로 모셨던 김 씨가 꾸민 사기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허술한 사기극에 속아 넘어간 걸까. 신 씨는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 학사를 마쳐야 석사를 하고, 석사를 끝내야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는 걸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교양있는 말투에 영어단어와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신 씨 같은 사람들을 무너뜨린 겁니다. 

김 씨는 자신을 박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 씨의 박사학위는 이 대학에서 본인이 자신에게 스스로 준 것이었습니다. 셀프 박사학위 수여쯤 되는 것이죠. 

아직도 김 씨는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미국 법에 따라 정상적으로 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학위를 남발한 것에 대해서는 "그사람들이 미국에 가면 다 박사고 석사다"라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선 종이 쪼가리일 뿐인데, 미국으로 건너가면 박사 학위증이 된다는 얘깁니다.  

김 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검찰로 송치됐습니다. 김 씨가 세운 이 대학은 지금도 종로구의 한 빌딩에 사무실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김 씨는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대학 운영을 계속 해나가겠다"는 입장입니다. 김 씨의 혐의가 확정되기까진 몇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까지 추가적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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