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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브리핑] 소록도 한센인 병원 100주년…희망과 치유의 공간

오늘(23일)은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 센터장, 김태현 변호사, 안서현 SBS 정책사회부 기자와 함께합니다. 

Q. 소록도 주임신부로 일하고 계신 김연준 신부님 모셨습니다. 신부님 어서 오십시오.

네. 반갑습니다.

Q. 소록도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한 5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Q. 5시간 반 정도요?

네.

Q. 그렇게 멀지 않은 길인 것 같은데 우리 마음의 거리 생각보다는 참 먼 것 같습니다. 소록도까지.

네.

Q. 혹시나 아직도 한센병에 대해서 잘못된 편견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제가 여쭤보는데요. 한센병 이제는 완치가 가능한 병이죠?

지금은 하나의 피부질환에 불과합니다. 의사들마다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긴한데 2주 만에 완치된다고 하는 의사도 있고 완전한 것은 6개월 정도 완치가 된다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Q. 한센병에 걸려도 길어도 6개월 안에는 완치가 가능하다?

네.

Q. 그리고 전염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완치가 되기 때문에 전혀 전염력은 없는 거죠.

Q. 아예 전염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이신 거죠?

네.

Q. 그런데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소록도에 계시는 분들은 다 완치가 된 분들일 텐데

그렇죠.  

Q. 지금도 소록도에는 많은 분들이 살고 계시죠?

네. 그렇습니다.

Q. 그렇다고 한다면 완치가 다 됐는데 소록도를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까?

2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한센병에 대한 후유증이 있죠.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없고 누가 또 씻겨줘야 되는 후유증에 따른 장애 때문에 소록도에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방금 말씀드렸듯이 편견의 문제인데 저는 12년 전에 보좌신부로 소록도에 갔거든요. 그때 되게 충격적인 얘기를 하나 들었어요.

뭐냐 하면 소록도에 있는 병사 지역이라고 있거든요. 한센인들이 환우들이 사는 마을인데 거기에 소나무가 되게 많죠. 그런데 거기에 소나무에는 사연이 있다는 거예요. 각각의 사연을 간직한다는 거예요. 무슨 사연이냐고 물어봤더니 목을 맨 사연을 간직한다는 거예요. 모든 소나무는. 그러니까 절망에 이르게 한다는 거였죠.

그게 이제 편견인데 제가 한센인 한 분이 저한테 보좌신부 때 신부님 이 병의 발병을 확인을 하고 나서 자살을 시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크게 들렸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옛날에는 이게 유전이라 생각했잖아요. 그 집안에 그런 피가 있어서 이런 병이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어떤 문제가 생겼냐 그러면 이제 집안사람들은 누구도 병 걸리지 않아도 한 집안 안에 한센인이 있다면 우물 물도 못 썼었어요.

그리고 결국은 왕따를 당하고 이사를 가도 알려지면 또 이사를 가야 되고 더 큰 문제는 다른 가족도 시집 장가를 못 가죠. 왜냐하면 그 집안에 그런 피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사돈을 맺으면 내 손주 때 그런 환자가 나타난다고 생각을 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병 걸리지 않은 다른 자식들은 그런 거 때문에 시집 장가를 못 가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 입장에서는 최대한 숨길 수밖에 없어요.

Q. 신부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이제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하다. 그래서 육신의 병은 다 낫는데 혹시 우리 사회의 편견이 그 분들에게 마음의 병을 더 안겨드리는 것은 아닌지 그런 안타깝고 죄송한 생각도 드는데요.

네.

Q. 어쨌든 소록도 이제 100년 됐습니다. 신부님 벌써 이번에 2번째 일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네. 100년을 제가 사전에 찾아봤어요. 100년이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근데 온이라고 하더라고요. 온 마음할 때 온자. 가득하다 채워졌다. 그러니까 소록도 100년이 이제는 한스러움을 벗어나서 어떤 치유의 섬으로 되는 출발이 되겠구나.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Q. 네. 외로운 섬에서 치유의 섬으로 가고 있는 소록도 그 100년이 되는 올해 소록도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도 보시면 아 이 분이구나 하고 아실 겁니다. 저희가 준비한 영상 한 번 보시죠.

Q. SBS 홈페이지에 보면 이 마리안느 수녀님을 보고 잠시 이 세상에 다니러온 천사가 아니냐. 이런 댓글도 있었는데요. 이 영상 보니까 저도 참 감동이 깊고 눈시울도 뜨거워지는데 마리안느 수녀님이 오셨을 때 소록도 주민들이 많이 좋아했겠습니다?

그 분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감동 자체였죠. 그 분이 떠나실 때 소록도의 한센인들 평균 연령이 70세가 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11년 오스트리아에 계신 동안 많이 돌아가셨죠. 또 새로 들어오시고. 근데 그 분들은 기억하신 분들은 감동 자체였습니다.

Q. 저희가 마리안느 수녀님 수녀님 이렇게 부르는데 신부님이 말씀하신 게 수녀님이 아니라면서요?

네. 그게 사실 고유명사어가 돼 버린 거죠. 그러니까 그 분들이 62년도에 오셨을 때 간호사로 오셨습니다.

Q. 간호사로요?

네. 20대 중반. 마리안느는 26살. 마가렛은 25살. 근데 이제 물론 그리스도왕 시녀회라는 가톨릭의 ‘재속회’ 회원이었지만 그때 당시 개념으로는 수녀님이 아니죠. 그런데 워낙 삶이 너무 거룩하고 아름답고 하니까 마리안느씨라고 붙이기가 좀 그랬어요.

그래서 그냥 가장 편한 용어 수녀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게 굳어져버렸죠. 그러다 보니까 어떤 문제가 생겨버렸냐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70이 넘은 나이에 이 분들이 떠난다고 했을 때 그냥 수녀원에서 노후를 편안하게 지내겠구나 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Q. 네. 그렇게 저희도 알고 있었죠.

누구도 이 분들의 노후를 챙겨주지 못했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70이 넘은 나이에 자기 집으로 간 거잖아요.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요. 또 놀라운 것은 간호사로 43년을 사시면서 월급을 받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자원봉사자로만 살았어요. 그러니까 빈손이죠. 그러니까 그냥 아무 것도 없이 간 거예요. 쉽게 말하면 더 놀라운 일은 비행기 값도 없었어요. 그때 가실 때.

Q. 오스트리아로 갈 비행기 값도 없었어요?

네. 그냥 누군가가 해줬거든요. 그래서 떠나셨는데 문제는 부모님도 안 계신데 친척들한테 의지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환영해주겠어요, 70이 넘은 할머니가 빈손으로 오시는데 부모님도 안 계시는데 친척들한테 가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고통스러운 결정이죠. 사실은 부담주기 싫다는 이름으로 떠나신 건데 사실은 그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죠.

Q. 그 오스트리아에 있는 가족들?

그렇죠. 네. 엄청난 부담이죠.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 된 거죠. 또 하나는 그 분들이 부담주기 싫다는 이름에.

Q. 신부님 그러면 마리안느 수녀님이 이번에 한국에 오셨단 말이죠. 근데 그런 어려운 사정이라면 그냥 한국에서 계속 사시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왜냐하면 저희 신부들이나 수녀님들이 외국에 선교사로 가잖아요. 그러면 15년 이상을 못 있게 해요. 왜냐하면 한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가서 15년 넘게 살아버리면 그 나라 그 문화에 적응돼 버립니다. 내 육체라든가 정신 상태가 거기에 세팅이 돼 버리기 때문에 15년 넘어버리면 자기 나라에 와서는 적응이 잘 안 됩니다. 근데 마리안느, 마가렛은 43년을 살았잖아요. 한국에.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완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이에요.

Q. 전라도 할매 이렇게 불리신다고요?

네. 그렇죠. 사고방식도 진짜에요. 진짜. 그런데 문제는 이 분들이 나이를 먹고 또 마리안느는 그때 대장암이었어요. 병원을 계속 왔다 갔다 해야 되고 불편했어요. 더 이상 봉사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평생을 항상 주신 분이었기 때문에 항상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게 부담스러웠고 또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한테 짐이 된다고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떠나기로 결정한 거죠. 근데 우리가 그렇다고 떠나보내면 안 되는 분들이죠. 한국 사람들이고 또 빈손으로 갔고 그래서 제가 그 부분이. 그때 같이 살았거든요.

그때 떠나실 때 제가 보좌신부로 있었고 지금까지 저한테는 굉장히 큰 죄스러움. 하나의 굉장한 미암함과 죄스러움으로 그 시간들이 저한테 남아있었던 거죠.

Q. 최근에 보면 한국에서 봉사하시고 좋은 일을 많이 하신 외국인들을 한국인으로 귀화시키기도 했거든요. 법무부에서. 그런 절차를 밟는 방법은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당연히 그 생각도 했죠. 저는 사실은 우리가 초대해서 오셨을 때 제일 먼저 그 분한테 해주고 싶었던 선물이 그거였습니다. 사실 이제 여기 소록도 함께 근무했던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 분도 은퇴하셨죠. 근데 그 분이 토요일마다 마리안느와 1시간씩. 10년을 넘게 1시간씩 통화를 해요.

그런데 마리안느는 한국이라는 표현을 안 써요. 우리나라를. 그냥 우리나라라고 표현해요.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을 표현할 때 우리나라라는 단어를 써요. 그게 이제 자기는 그게 진짜 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미안함도 있고 또 당연히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저는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게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중국적이 가능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정말 컸어요. 당연히 우리의 예의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 그 분들은 원하지 않죠. 이것도 짐이 된다고 생각했죠.

근데 저는 그럴지라도 우리 입장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예를 들면 며칠 전에 고흥군에서 마리안느, 마가렛 명예군민증. 우리 군민으로 이렇게 했었거든요. 처음에 반대했어요. 나 그거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라고. 이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니까 받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허락하셨어요.

처음에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명예군민증을 받고 했을 때 너무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 뒤로. 농담으로 며칠 있다가 나 고흥군민 됐으니까 세금 내야지. 하고 그런 농담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무조건 그 분이 싫다고 해서 그만둘게 아니라 그 마음을 바라보고 일하는 게 중요할 것 같더라고요.

Q. 법무부에 귀화신청 절차 알아보셨습니까?

알아봤죠. 알아봤는데 저의 생각은 80이 넘은 연세고 그렇기 때문에 그쪽에서 모든 서류 정리해서 사인만할 수 있게. 출생기록부는 제가 가져왔거든요. 그러니까 사인만 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제 또 와가지고 서류 작성하고 뭐 찍고 왔다 갔다 해야 되고 하니까 제가 그거는 포기해버렸어요.

너무 경직된 것 같은. 그래서 사인만 해도 설득하는 게 좀 쉽지가 않은데 서류 작성하고 왔다 갔다 하는 거는 정말 그건 마리안느가 더 부담 준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 문제는 제가 포기를 했죠. 대신 이제 한국에 살게 하는 노력은 계속 설득은 하고 있습니다.

Q. 그렇다고 한다면 법무부에서 특별 귀화, 시험 같은 거 안 보고 마리안느 수녀님이 지금 신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로 큰 기여를 하시고 봉사를 해오신 분 아닙니까, 이제 한국 분이나 마찬가지고 특별 귀화 절차 이런 거를 적극적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Q. 신부님도 그렇게 간절히 바라시는 거고요?

네.

Q. 신부님이 이번에 두 번째 부임이시라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 번 소록도에서 일하셨으면 이제는 또 다른 곳에 가서 또 신부님으로 일하실 수도 있는데 다시 소록도로 가신 것도 자원하셨다는 얘기도 있고요?

네. 소록도는 특수 사목지로 분류되기 때문에 본인이 의사가 있어야 됩니다. 근데 사실 보좌신부 때 소록도의 삶이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감동. 두려움으로 제가 갔는데 일단은 마리안느, 마가렛을 제가 만났고 같이 살았고 그것이 저한테는 엄청난 행운이었고 또 한센인들의 아픔을 아는 것이 고통스러운 거지만 한쪽으로는 굉장한 감동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언젠가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보좌신부 때 했었죠.

Q. 지금 신부님께서 소록도의 아픔, 한센인들의 아픔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소록도는 우리에게 단순한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의 편견과 차별을 보여주는 그런 슬픈 역사가 아니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저희가 그 모습을 화면으로 한 번 모아봤는데요.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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