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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21세기 술탄 에르도안 ① - 언론 탄압과 反테러법

[월드리포트] 21세기 술탄 에르도안 ① - 언론 탄압과 反테러법
지난 3월 5일 새벽, 터키 이스탄불의 한 건물 앞에 수백 명의 시위대가 모였습니다. 시위대는 저마다 '터키 언론 자유의 수치스러운 날입니다'라는 문구가 1면에 새겨진 신문을 손에 들었습니다.

동 틀 무렵 수천 명의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시위 진압대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폭죽이 터지듯 최루탄이 시위대에 쏟아졌습니다. 하얀 최루탄 연기가 거리를 뒤덮었습니다. 무거운 밤 공기 탓에 최루탄 가스는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랐다가 내려 앉으며 시위대를 집어삼켰습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대열에서 빠져 나오는 시위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래도 시위대 대부분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어서 살수차가 등장했습니다. 냉기가 남아 있는 3월의 밤 공기를 가르며 차가운 물줄기가 시위대에 쏟아졌습니다. 우비를 뒤집어쓰고 어깨 동무를 하며 버텨보지만 여기저기서 물대포를 맞고 나뒹구는 시위자가 속출했습니다.

시위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재빨리 건물로 접근했습니다. 정문에 채워진 쇠사슬로 용접기로 절단했습니다. 이어서 쏜살같이 건물로 들어가 순식간에 건물을 점령했습니다.
자만 시위대
경찰이 쳐들어간 건물은 터키의 자만 신문사라는 곳입니다. 터키 법원이 검찰의 요청으로 이 자만 신문사에 대해 법정관리를 결정했습니다. 신문사 재정이 어려웠냐고요? 아닙니다. 자만 신문사는 터키에서 최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이 신문사는 정부에 늘 비판적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은닉 자산이 수천억 원 대에 달한다며 비리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한 곳입니다. 한마디로 반정부 성향의 언론사였습니다. 법정관리를 요청한 검찰의 주장은 '테러리스트와의 연계' 혐의였습니다. 법원은 법정관리를 결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신문사를 손에 넣은 터키 정부는 강도 높은 검열을 시행했습니다. 당장 기자들의 사내 서버 접근과 기사 출고를 차단했습니다. 기자들은 허가 없이는 이메일도 열어볼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편집장은 해고됐습니다.

법정관리 첫 날 자만 신문의 톱 기사는 대통령의 동정 기사였습니다. 터키를 제외한 전세계 언론이 이 사건을 '언론 탄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터키에서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사라지고 있는지, 언론에 대한 억압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 터키엔 표현의 자유가 있나?

법정관리에 들어간 건 자만 신문사만이 아닙니다. 같은 계열인 영자신문 '투에이스 자만'과 '시한통신사'도 강제로 법정관리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페자'라는 미디어그룹의 계열삽니다.

페자 그룹은 터키에서 1급 지명수배 테러리스트 명단에 든 '페툴라 귤렌'이라는 이슬람 사상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명확한 근거는 아직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페툴라 귤렌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이것 말고도 '줌휴리에트'라는 일간지의 편집장 등 2명이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들은 터키의 정보기관이 시리아에 무기를 몰래 팔아 넘기고 있다는 의혹을 특종 보도했습니다. 터키 법원이 이들에 적용한 혐의는 '국가 기밀 누설죄'입니다. 무기 밀매한 건 사실인데 그건 국가기밀이니 밝혀선 안 된다는 논립니다.

2년 전 CNN의 특파원이 터키 이스탄불에서 반정부 시위를 생방송하던 중 터키 경찰에 구타를 당하고 체포되기도 했고, 얼마 전 터키 정부를 비판한 네덜란드 기자는 강제 구금됐다가 추방당했습니다.
대통령 풍자시를 SNS에 올려 기소된 2006년 미스 터키
이뿐이 아닙니다. 지난 2년간 대통령 모욕죄와 국가 모독죄로 기소된 터키인만 무려 2천 명에 달합니다. 반정부 인사와 언론인은 물론이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와 축구선수, 미스 터키, 10대 소년까지 포함됐습니다.

2006년 미스 터키에 뽑힌 뷰육사라츠는 대통령을 풍자한 시를 자신의 SNS에 공유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은 터키 정부가 90년 전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을 학살한 사건과 20년간 쿠르드족 3만 명을 학살한 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글을 썼다가 국가 모독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터키에선 대통령 모욕죄로 최대 징역 2년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모욕죄로 처벌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요즘은 무더기로 처벌자가 쏟아지는 상황입니다.

●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또 하나 인권침해와 언론탄압을 마음 놓고 저지를 수 있는 기반은 '반테러법'입니다. 요즘 같이 폭탄테러며 반군과 전쟁으로 어수선한 터키 정국에선 테러를 근절하고 테러범에 철퇴를 가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조치겠죠.

그런데, 법이라는 게 아무리 잘 만들어도 쓰는 사람에 따라 보약이 될 수도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테러법은 1991년 당시 분리독립을 요구한 쿠르드족과 분쟁이 벌어지면서 터키 정부로선 필요악으로 제정한 법입니다.

테러에 직접 가담한 자에 대한 엄벌은 당연하겠지만 문제가 되는 건 테러나 국가에 해를 가하는 행위를 '조장'한 경우입니다. 이 '조장'의 기준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테러범이나 반역자가 될 수도 안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젭니다.
에르도안 대통령
터키의 반테러법에서 논란이 되는 조항은 바로 '8조 1항' 부분입니다. 제가 법적 용어를 잘 모르지만 제 수준으로 해석을 하면 '터키의 통합을 해할 목적(aim at)을 가진 모든 선전물과 집회, 모임, 시위는 본래의 의도나 사상, 수단과 관계없이 모두 금지된다'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동기보다는 결과를 가지고 판단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원래 의도가 어떻든 결과나 행위적으로 터키의 통합을 해할 목적을 가졌다고 보면 반테러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누가 판단하느냐에 따라 코걸이도 귀걸이도 될 수 있습니다. 정부를 비판한 신문기사는 사람에 따라 터키의 통합을 방해하는 선전물로 볼 수 있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말은 정부 전복을 조장했다고 볼 수 도 있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 2월 터키의 한 남성은 자기 아내가 TV에서 대통령이 나올 때마다 욕설을 내뱉으면서 채널을 돌렸다며 신고했습니다. 터키 검찰은 부인이 한 욕을 근거로 삼아 대통령 모욕죄를 적용해 기소했습니다.

터키 정부는 최근 4년 사이 2만 명이 반테러법에 연루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지난해는 8천 명이 반테러법에 따라 투옥됐습니다. 터키에 정부 전복을 노리는 불순분자가 아주 아주 많거나 반테러법이 무분별하게 적용되거나 둘 중 하나겠죠.
 
미 백악관의 30배 넓이인 터키 대통령궁
● '21세기의 술탄'

예상은 하셨겠지만 이런 논란의 중심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있습니다. 2002년부터 터키 총리에 올라서 12년간 장기 집권하다가 2014년에는 대통령에 출마해서 15년째 터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터키의 푸틴'이라고 불립니다.

앞에 썼듯이 언론 탄압 무진장 합니다. 언론뿐이 아닙니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면 정치인, 검찰, 경찰, 일반 시민도 가리지 않고 철퇴를 휘둘렀습니다. 반테러법과 대통령 모욕 혐의를 양껏 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독재자”로 부른 야당 지도자에게 3만2000 달러짜리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고, 같은 여당 전 국회의원도 트위터에서 에르도안을 모욕했다고 3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에르도안의 포스터를 찢었다는 이유로, 12~13세의 소년 2명이 4년 징역형을 받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터키의 히틀러'라고 비난 받습니다.

에르도안은 2014년 우리 돈 6천억 원을 들여 대통령궁을 새로 지었습니다. 부지만 20만㎡입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과 영국 버킹엄궁보다 넓습니다. 미 백악관의 30배 넓입니다. 방이 1,000개가 넘습니다. 녹지에 건물을 지어선 안 된다는 법원 판결도 무시하고 수백 그루의 나무를 잘라 초호화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21세기의 술탄'이라고 불립니다.

원래 에르도안 대통령 이야기를 하려고 쓴 글인데 길어져서 본론은 다음 편에 다루겠습니다.   

▶ [월드리포트] 21세기 술탄 에르도안 ① - 언론 탄압과 反테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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