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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5·16 재평가! 하겠다는 한국, 막겠다는 중국

동양 문화권, 특히 한국과 중국 사람들은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전환점이 된 날을 숫자로 기억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1월 셋째주 월요일(마틴 루터 킹 탄생일), 이런 식으로 기념하는 미국과는 다릅니다.

한국의 8·15 광복이나 중국의 10·1 공산당 창건 같은 경축일은 물론, 5·18 광주민주화운동, 6·4 톈안먼사태 같은 비극적인 사건도 간단한 숫자로 변환돼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현대사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5·16입니다. 각기 다른 역사적 의미와 배경을 가진 5·16을 두고 공교롭게도 두 나라에서 재평가 논란이 뜨겁습니다.

이승만 정권 몰락 후 들어선 제2공화국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던 1961년 5월 16일, 해병 1여단 소속 군인들이 한강 대교를 건넜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은 자신들을 막아선 헌병대에 발포했고, 정부 기관과 방송국을 장악한 뒤 군사 정부가 들어섰음을 선포했습니다.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은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에 올랐고 군복을 벗은 뒤 민정이양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리고는 3공화국, 4공화국을 이어가며 1979년 10·26 사건까지 16년 동안 철권통치를 이어갔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의 시작점이었던 5·16을 군사 혁명으로 미화했고, 매년 5월 16일이면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최고회의 의장 시절, 5.16이 부패와 당파싸움, 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에 항거한 서민혁명인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는 발언을 남겼습니다. (1963년 10월 4일 자 동아일보 1면) 3공화국은 헌법 전문까지 뜯어고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라며 5·16을 혁명의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뒤 8년이 지난 1987년, 6월 항쟁으로 얻어 낸 개헌으로 '5·16 혁명'이라는 대목은 헌법에서 삭제됐습니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쿠데타'로 규정한 이후, 대부분의 교과서와 언론에서 5·16을 쿠데타로 기록해 왔습니다. 5·16이 '쿠데타'라는데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듯 했습니다. 더 이상 재평가는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큰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부친의 서거 후 33년 만에 집권에 성공한 겁니다. 부친의 공과에 대한 재평가를 필생의 과업으로 여겨왔을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5·16에 대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구국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대통령의 지지 기반인 보수 진영에서는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주요 과제로 삼아 강력히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편협하고 왜곡된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균형 잡힌 역사관을 정립해주는 일이 시급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다른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5·16도 재평가하겠다는 겁니다.

5·16에 대한 재평가는 사실상 5·16 복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진보 진영과 시민사회에서는 이미 끝난 과거사에 대한 평가를 새로하자는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지난 총선 때처럼 내년 대선 국면에서도 보수, 진보 양 진영 간에 역사교과서 문제, 즉 과거사 재평가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부각될 게 확실해 보입니다. 소모적인 국론 분열이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중국에서 5·16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 최고의 암흑기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을 상징합니다. 수 천만 명을 굶어 죽게 만든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류사오치, 덩사오핑에게 실권을 내준 마오쩌둥은 절치부심 권좌 복귀를 노립니다.

마오는 어린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앞세워 정적들을 주자파(走資派), 즉 자본주의의 추종자로 몰아붙이더니 급기야 1966년 5월 16일, 류와 덩에게 과녁을 겨눈 채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문혁의 지도방침서가 된 통지문을 발표합니다.

이것이 바로 5·16 통지입니다. 문혁의 광풍은 중국 대륙을 무법천지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그 와중에 수백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윤리와 전통은 파괴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부모자식도 믿지 못하는 극도의 공포는 인간성을 말살시켰습니다.
끝이 안 보이던 문혁의 광풍은 마오의 죽음과 함께 4인방이 체포되면서 10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문혁시기 갖은 고초를 겪었던 덩샤오핑이 집권한 뒤 열린 1981년 제11기 6중 전회에서 공산당은 "문혁은 마오의 착오로 일어났으며, 반혁명 집단(4인방 등)에 이용돼 엄중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이라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덩샤오핑은 "마오 개인과 중국공산당 지도이념으로서의 마오의 사상은 구별해야 하며, 마오의 공은 70%, 과오가 30%이다"라는 모호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공산당 집권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문혁을 당이 아닌 마오 개인의 착오로 치부하되, 마오에게도 공은 있었다'며 대중의 무고한 희생에 대해서는 사과 한 마디 없이 입을 다문 겁니다.

지난 5월 16일자로 잊고 싶은 기억인 '문혁'이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손을 델 수 있는 뜨거운 감자라 중국 정부고 언론이고 모두 몸을 사리고는 있지만 5·16, 즉 문혁에 대한 재평가는 분명 중국 사회의 핫 이슈입니다.

경제 쾌속 성장의 그림자인 극심한 빈부격차와 양극화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으로 중국 사회에 좌경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문혁을 재평가해야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오 이후 최고의 권위를 누리며 1인 독주를 가속화하고 있는 시진핑 주석의 행보를 두고 문혁 시절 마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시 주석에 대한 찬양가가 유행가가 되고 가슴에 시 주석 뱃지를 단 채 천안문광장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오 어록집을 손에 들고 집단최면에 걸린 듯 열광하던 문혁 당시 홍위병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지난 2일에는 급기야 중국의 걸 그룹인 '56송이 꽃'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문혁 시절 홍색가요에 시 주석에 대한 찬양가를 곁들인 레퍼토리로 성대한 공연을 하자 시 주석에 대한 개인 우상화가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런 시각을 양산한 주체가 중국에 대한 견제심리가 강한 서방 언론들이긴 했지만, 시 주석의 비서실격인 당 중앙판공청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습니다. 걸 그룹 '56송이 꽃'과 소속사는 성명을 내고 자신들이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산하 단체 명의를 도용해 음악회를 열았던 것이라고 공개 사과했습니다. 중국 최고지도부나 공산당의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고 항변한 겁니다.

중국 정부는 문혁 50주년을 기념하는 어떤 행사도 하지 않았고 언론들도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인민일보는 문혁을 10년의 동란으로 칭하며 문혁 기간 중국은 세계와 격리돼 있었다고 언급한 시 주석의 지난 1월 발언을 뒤늦게 공개했습니다.

시 주석은 지난 2일에는 언론인들과의 좌담회에서 "설령 지식인들의 의견에 편견이 있고 정확하지 않더라도 꼬투리를 잡고, 몽둥이질을 하고,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며, 문혁 시대의 극단적 좌경화를 에둘러 비판했습니다.

사상과 언론을 통제하며 정치는 좌경, 경제는 우경 노선을 걷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 주석의 발언인지라 그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문혁에 대한 평가는 앞서 언급한 1981년 공산당 결의를 통해 이미 끝났음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재확인한 것으로 간주됐습니다.

중국 주류 사회에 형성된 문혁에 대한 공감대는 분명해 보입니다. 문혁 같은 비극이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대중들은 문혁이 재연될 경우 어렵게 일궈 온 개혁개방의 경제 성과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가난만 남을 뿐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시 주석을 정점으로 한 중국 최고 지도부가 문혁에 대한 재평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릅니다.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집단지도체제 대신 강력한 1인 집권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자칫 마오를 연상시키는 1인 우상화 논란이 문혁에 대한 재평가 논란으로 번질 경우 잠재된 문혁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극단주의적인 대중 운동으로 폭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되살아난 문혁의 망령이 수습할 수 없는 사회 혼란은 물론 공산당 일당 체제에 대한 부정까지 불러올 것을 차단하겠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중국의 많은 양심적인 학자나 지식인들은 문혁에 대한 재평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문혁을 미화하자는 게 아니라 문혁에 관한 진실을 반드시 밝히고 넘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문혁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 돼 왔습니다.

문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 수가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인 150만 명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주장도 검증할 길이 없습니다. 문혁에 버금가는 중국의 상처인 89년 톈안먼 사태에 대한 진실 규명도 궤를 같이 합니다. 그 폭발력을 감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중국 지도부는 톈안먼 사태에 대해서도 재평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정설(定說)이 중요한 법입니다. 정설(定說)이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정한 결론에 도달하여 이미 확정되거나 인정된 설'을 말합니다. 자신의 가치판단이나 정치적인 타산에 매몰돼 무엇이 옳다(正)는 식으로 단정하는 정설(正說)을 앞세워 역사를 재평가하거나 혹은 재평가를 막으려는 권력의 시도는 계속돼 왔습니다.

하지만 결국에 역사는 권력자가 아닌 대중들의 손에 의해 쓰여지고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마치 아무리 막아보려 해도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역사에는 정설(正設)은 없고 정설(定說)만 있다고 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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