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전두환 등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시위가 자신들의 정국 장악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공수부대를 증파하고, 조속한 진압을 요구한다.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하는 과정에서 20일 자정 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이에 따라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 등에서 총기를 확보해 무장 저항을 시작한다.>
"내란 목적 살인 등으로 기소된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 한다” <1997. 4. 17. 대법원>
5.18은 민주화운동이다. 사법부는 당연한 이 명제를 확인하며,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시민을 살해한 살인범에게 단죄를 내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5·18항쟁에 대한 왜곡은 암세포처럼 퍼져나갔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왜곡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이 기억하고픈 ‘5.18’은 정당한 국가 권력에 시민이 폭력으로 대항한 ‘폭동’이다. 이들은 ‘보수’라는 외피를 둘렀지만 극우세력으로, 5.18에 북한이 개입됐다고도 주장한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맥락(context)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사실(fact) 중 몇 개만 취사 선택해 자신들의 이념틀로 재구성한 뒤 , 다른 사실은 무시하는 전략을 취한다.
시민군의 사진을 보고, 총을 들고 있으니 무장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최근엔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등 왜곡의 수준도 심해지고 있다. 1997년과 2002년 5·18 항쟁 관련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5·18 항쟁은 항구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됐으니 이런 왜곡 시도는 일부 극우세력의 일탈로 규정하고 무시하면 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5.18항쟁의 진실이 밝혀졌다고 믿는 사이, 그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오염됐고, 방치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더 이상 진실이 오염되는 걸 막기 위해선 5.18에 대한 왜곡 근원부터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왜곡 주체, 방식, 과정을 정밀 분석했다.
● 왜곡 근원은 전두환 등 신군부의 ‘불순 세력 주도설’
하지만, 2000년 대 이후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2002년을 기점으로 5·18 항쟁을 ‘광주사태’로 규정하거나 이런 주장을 인용한 언론 기사가 증가하기 시작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13년 5·18 항쟁을 ‘광주 폭동’으로 규정한 기사나 그런 주장을 인용한 기사가 대폭 증가한다.
언론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볼 때, 2016년 현재 5·18 항쟁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결과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2002년과 2013년이 분기점이 된 것일까?
● 끝나지 않은 5·18 항쟁 진상 규명…왜곡 세력의 잠복기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포털사이트 네이버, 다음, 네이트의 블로그와 카페 게시글, 해당 포털사이트를 통해 검색이 되는 웹문서, 뉴스 등을 분석했다. 5 ·18 항쟁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기원과 주체, 전개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서다. 5·18에 대한 왜곡의 두 축이 ‘5·18은 폭동이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라는 사실에 근거해 검색 키워드로는 ‘광주+폭동’과 ‘5·18+북한군’으로 설정했다.
네이버 라이브러리 기준, 공공의 영역이라고 할 언론지면에 5·18 항쟁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첫 기사는 1980년 5월 31일이었다. 당시 신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계엄사령부가 5·18에 대한 경위와 사후처리방침에 대한 발표문을 실은 것이었다. 이후 1980년에 몇 차례 더 5·18를 폭동으로 규정하는 기사가 등장하지만, 이 또한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인용하거나, 해당 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을 인용한 것으로서 결국 5·18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주체는 신군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본 5·18 관련 키워드별 사용량 분석 결과와 같이 이후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기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 정권 교체 극우세력의 역습
또, DJ 정권의 사람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켜놓고 계엄령을 선포"해, "(대통령)선거도 없고, 우익들이 잡혀가고, 김정일이 무혈로 서울을 장악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광고를 게재한 곳은 극우 칼럼리스트 지만원이 대표로 있는 시스템사회운동본부였다.
광고라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언론이라는 공적 영역에 다시금 5·18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한 건 생경한 일이다. 북한 배후설은 신군부가 5·18 당시에도 유포한 것이었지만, 북한 특수군이 5·18 항쟁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해당 광고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5.18 왜곡을 연구해 온 오승용 전남대 교수는 2002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한다.
오 교수는 “1997년 대법원이 전직 대통령 전두환에 대해 내란(12.12 쿠데타) 및 내란목적살인(5·18 항쟁)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후 숨죽이고 있던 보수 세력이 반발했었다”며, 일간지에 해당 광고가 게재된 것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던 극우세력이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또 정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 인터넷 보급과 종편 탄생…왜곡의 심화
하지만, '왜 2002년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전에도 전두환 씨 등 신군부 인사를 중심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주장은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사회적 자정 작용에 의해 걸러졌고,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5·18 항쟁에 대해 소리 높여 ‘폭동’이라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2002년 이후 지만원과 같은 왜곡세력의 주장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것일까? 전문가들은 익명성과 무한 복제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의 보급을 이유로 꼽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부터 본격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은 2002년에 전체 가구의 70.2%에 보급될 정도로 대중화됐다. 이후에도 가구 인터넷 보급률은 꾸준히 증가하는데 2012년에는 82.1%에 달한다. 스마트폰도 대중화되면서 현재는 대부분의 국민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인터넷 대중화는 5·18 왜곡 담론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증가, 그리고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심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경향을 특정한 이벤트를 기점으로 더욱 증폭되는 양상을 보였다.
인터넷 상에선 ‘화려한 휴가’가 5·18을 미화한 것으로 실상은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게시글들이 올라왔는데, 한 언론사는 ‘화려한 휴가’를 본 누리꾼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이른바 전사모 회원 간에 댓글 전쟁이 붙었다며, "(전사모)회원들은 5·18을 공산폭동으로 규정지으며 전 전 대통령을 비호했다"고 댓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2009년 3월과 5월, 2011년 5월, 2013년 5월 시기별 최고점을 기록했다. 2009년 3월은 용산 참사와 이후 전개된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던 시기이다. 당시의 게시물들은 ‘촛불 집회가 소수 불순세력이 주도했고, 과거 5·18도 불순세력이 주도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룬다. 2009년 촛불 집회를 비판하면서 29년 전인 1980년 5월의 광주를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2009년 5월 이명박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행사에서 5·18 항쟁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하면서, 5·18항쟁 단체들이 행사 참석을 거부했던 시기이다.
20011년 5월은 5·18 항쟁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과 관련해 극우단체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한 시기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등을 찾아가 “광주시민 학살은 북한 특수부대 소행”이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 이들 단체들은 “5·18는 북한군이 개입된 폭동이었다”며 “잘못 알려진 진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TV조선>은 북한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임천용이라는 인물을 출연시켜, “(5·18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군 1개 대대가 침투했다”며,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고 북한에서 내려온 게릴라였다”는 주장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 해당 방송으로 두 종편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법적·사회적으로 공고화된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의미와 희생자와 참가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할 우려가 크다”며 중징계를 받았고 해당 종편은 사과 방송까지 했다. 하지만, 왜곡 발언이 담긴 방송 내용은 사진 또는 게시물 형태로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퍼진 뒤였다.
● 지속적 왜곡…의혹을 넘어 '담론·논란'이 된 왜곡
계기는 탈북자들의 주장, 특히 북한특수군 출신 탈북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언’이었다. 2009년 6월, ‘자유북한군인연합’이라는 단체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5·18에 북한 특수군이 투입되었다는 내용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이 발간했는데, 이 책이 5·18에 북한군 투입된 증거라는 글이 블로그와 게시판 등에 광범위하게 게재됐다. 저자인 자유북한군인연합의 대표는 앞서 종편에 출연해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한 임천용이다.
하지만,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증언자로 등장한 탈북자 중에 실제로 1980년 5월, 북한 특수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사람은 없다. 김희송 전남대 교수의 "5·18 역사 왜곡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탈북자들의 증언은 친구나 직장 동료 등에게 들었던 소문이거나 심지어 ‘군당비서에게 들었다는 아버지의 전언’ 등 전언의 전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북한이라는 특수성,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북한을 실제로 경험한 탈북자의 이야기라는 접근의 제한성을 바탕으로 이들의 ‘전언’은 사실로 포장돼 필요에 따라 소비됐다.
왜곡 과정을 분석해보면, 탈북자의 전언에 바탕한 ‘북한 특수군 개입설’이 대표적으로 소비된 시기가 2011년 5월이었다. 이 시기는 앞서 언급했듯 극우단체들이 탈북자들의 전언을 근거로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며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 반대운동을 펼쳤던 때다. 그리고 2013년 5월, 종편이 ‘북한 특수군 개입설’을 여과 없이 방송하며 대량 유통됐다.
이런 결과를 종합하면, "5·18은 폭동"이라거나 "5·18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식의 주장은 보수 정권이 촛불 집회 등과 같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고 5·18 항쟁의 제도화가 진전되는 이벤트가 있을 때, 그리고 종편 출범 이후에 증가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5·18 왜곡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실체는 뭘까?
● '극우 이론가 + 일베' 왜곡담론 생산과 유통 분업 구조
5·18 왜곡 담론이 지만원과 김대령이라는 인물에 의해 생산됐다면, 유통은 극우성향 사이트인 일간베스트 저장소, 소위 ‘일베’를 통해 이뤄졌다. 광주 사람을 ‘홍어’라고 비하하거나 5·18 항쟁 당시 사망자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사진을 두고 ‘시체놀이’ 등으로 비하해 물의를 일으켰던 ‘일베’다. 일베에서 ‘5·18 북한군 개입’ 게시글이 2012년 11월 30일 처음 등장한 이래, 2016년 5월 13일까지 809건이 게시됐다.
이는 해당 기간 동안 전체 웹문서 게시글의 88.6%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북한군 개입설’이 일베를 통해 대부분 유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베 내에서 5·18을 폭동이라고 규정하는 내용의 게시글도 2012년 5월 처음 등장한 이래 5월 13일 현재까지 1,832건이 게시 됐는데, 이는 해당 기간 전체 웹문서의 18.8%를 차지하는 수치다.
● 집단 극단화로 신념화 된 5·18왜곡
5·18 기념재단과 광주시를 중심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대책위를 만들어 신고 센터까지 운영하고 있지만, 5·18 왜곡은 끊이지 않고 있다. 5·18 왜곡 담론 생산 및 유통자들은 ‘정부의 5.18 민주항쟁 결과 발표는 사실을 호도한 정치적 판단의 결과“라며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같은 보수인사라고 하더라도 “5·18에 북한군이 개입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거나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으로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와 관련해 오승용 전남대 교수는 “사법 처리가 능사는 아니다”고 전제하면서도 “현재로서는 5·18 왜곡 담론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적극적 사법처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 교수는 “인터넷 사용이 활성화되면서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을 강화하는 의견만 받아들이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집단 극단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5·18 왜곡담론’과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논리나 사실로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사법처리를 통해 왜곡담론의 확산을 차단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부와 우리 사회가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한 5·18 항쟁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데도,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는 것이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래로 대통령 비판 등 정부 정책 왜곡에 대해서 적극적·공격적으로 대응하면서도 5.18 왜곡에 대해선 손을 놓고 방치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또, 2009년 이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하면서 정부가 논란을 부추긴 면도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 회담에서 야당 원내대표들이 올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자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또 불허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5·18이 다시 주요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지금까지 분석 결과는 5·18 항쟁이 현안이 될 때마다 5·18 왜곡도 증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5.18 항쟁 왜곡에 대해 정부의 대응은 어떠할까. 나치의 선전 장관 괴벨스는 "거짓말은 처음에 부정되고, 그 다음 의심 받지만, 되풀이하면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고 했다. 어쩌면 이것이 5·18 왜곡 담론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안혜민(인턴)
디자인/개발: 임송이
※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 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