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취재파일] "친박 자숙하자"…최경환의 영(令)이 안 서는 이유

[취재파일] "친박 자숙하자"…최경환의 영(令)이 안 서는 이유

김수형 기자 sean@sbs.co.kr

작성 2016.04.29 11:55 수정 2016.04.29 17:23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친박 자숙하자"…최경환의 영(令)이 안 서는 이유
● 친박이 친박을 비토…최경환이 유기준에게 내린 '친박 파문 선고'

친박 핵심으로 통하던 유기준 의원의 원내대표 출마 선언은 진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제(27일) 오전 출마 선언이 있을 거라는 말이 기자들 사이에 돌더니, 출마 선언문까지 공개됐습니다.

기사 작성 편의를 위해 가끔 회견문이 미리 공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먼저 보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기자회견은 계속 미뤄졌습니다. 회견문도 초안이 유출된 것일 뿐이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언제 출마 선언을 할지 결정된 바 없다는 말이 다시 전해졌습니다.

오후에는 친박계 핵심 최경환 의원이 두 의원과 최종 조율을 시도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결과를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 친박 원내대표 후보로 유기준 의원으로 단일화됐다는 소식이 공개됐습니다. 또 다른 친박계 의원으로 원내대표 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홍문종 의원은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대표나 최고위원에 도전할 거란 얘기도 전해졌습니다. 친박 핵심들이 모여 일종의 빅딜을 시도한 것인데, 당사자들에게 연락이 쉽게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제(28일) 최경환 의원이 직접 입을 열었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듣기 위해 전화를 걸어봤더니, 최 의원은 뜻밖에 "유기준 의원은 친박 단일 후보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유기준, 홍문종 의원과 원내대표 출마 문제를 논의하면서 원내대표 선거에는 두 사람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겁니다. 선거 참패의 책임론이 가시기 전에 친박들이 우르르 원내대표 선거에 나가는 모습이 좋지 않다며 "지금은 자숙해야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홍문종 의원은 그 자리에서 출마 의사를 접고 전당대회로 나가는 걸로 방향을 틀었지만, 유기준 의원은 출마 의사가 강했습니다.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유 의원이 요청해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친박 단일 후보라고 기사가 나와서 무척 당황스럽다는 게 최경환 의원 설명이었습니다.

출마의 자유는 있지만, 유 의원에게 친박 후보라고 팔지는 말라고 분명하게 경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친박계에서는 이번 원내대표 선거에서는 유기준 의원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파문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누리당 유기준 의원 (사진=연합뉴스) ● 유기준의 '마이웨이 선언'…"친박 후보 지칭 사양"

만약 선거 전이라면 최경환 의원이 이정도 말을 했다면 적어도 친박계 내부의 교통정리는 가능했을 겁니다. 진박 감별사'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박근혜 대통령과의 가교 역할을 하며 친박 진영의 사령관 역할을 했던 게 최경환 의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상대는 핵심 친박으로 현 정부 해수부 장관을 지냈던 유기준 의원입니다. 누구보다 손발이 잘 맞아야 할 두 사람이었지만, 유 의원은 결국 원내대표 출마를 강행하며 항명을 선언했습니다.

유기준 의원은 원내대표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하면서 "더 이상 계파 정치는 없다"며, "저부터 친박 후보라는 지칭을 사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유기준 의원은 탈당파 무소속 의원들의 복당도 해야 한다고 밝혔는데, 아직까지 청와대와 불편한 관계인 유승민 의원까지 받아들인다는 뜻이어서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러닝메이트 정책위의장으로 출마한 이명수 의원은 한술 더 떠서 "당청관계가 부족했던 게 총선 실패 원인이었다"며,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필요하면 청와대에 쓴소리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유기준 의원이 자신의 뜻대로 출마를 관철시켰지만, 친박계를 떠나 완벽하게 계파 정치를 초월하겠다는 건지는 불분명합니다. 유 의원은 오늘 아침 라디오 방송에 나와 "탈박이 아니라 탈계파 선언이다"고 해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친박이라는 것은 전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친박 팔지 말라니, 친박이라는 표현은 안 쓰겠지만, 여전히 친박 후보는 자신밖에 없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이번 총선을 거치며 60, 70명의 친박계 의원들이 들어온 만큼, 그래도 친박 원내대표를 원한다면 자신을 찍어달라는 구애로 해석해야 할 거 같습니다.

● 역대 가장 어려운 원내대표 두고 '군웅할거'

이번 원내대표 선거에는 이미 출마선언을 한 유기준 의원을 비롯해 비박계에서는 나경원 의원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정무수석을 지냈지만, 친박 성향으로 분류되는 정진석 당선인도 출마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진주에서 4선에 성공한 김재경 의원도 출마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내대표 선거에서 패가 갈려서 싸우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며 합의 추대 얘기도 나왔지만 경선을 피하기는 어렵게 된 겁니다. 선거 과정에서 총선 책임의 네 탓 공방이 벌어지며 당이 상처를 입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번에 선출될 원내대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역대 어느 원내대표보다 어렵게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참사라고 부를 수 있는 4.13 총선의 뒷수습을 하고, 거대 야당과 상대해야하는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22석에 불과한 새누리당은 이제 집권 여당으로 누리는 프리미엄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당은 버티기로 일관하면 야당의 공세쯤은 거뜬하게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야당 둘이 손을 잡으면 새누리당이 버텨도 어렵습니다. 여당 원내대표가 야당을 잘 설득하지 않으면 새누리당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회를 끌어가기는 커녕 야당의 공격에 녹다운될 수도 있습니다.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 ● 자숙하자는 최경환, 원내대표는 안 되고 대표는 되나?

최경환 의원이 유기준 의원에게 자숙하자며 원내대표 출마를 말렸다는 얘기는 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선거 참패의 책임을 친박계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 책임은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비박계 지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직책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던 유기준 의원도 광의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자숙하며 원내대표 선거는 계파 다툼 없이 치르자는 취지는 새누리당 내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문자 그대로만 해석할 때 얘깁니다. 최경환 의원의 만류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있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곧 당대표를 뽑기 위해 전당대표가 열리는데, 그때 최경환 의원이 출마하기 위해 원내대표를 비박, 적어도 친박색이 약한 의원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해석입니다.

최경환 의원에게 전당대회 출마 계획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마음을 비운지는 오래됐지만 두고 보자"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전당대회에 도전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이미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습니다. 전당대회를 늦게 치른다면 선거 패배의 책임론이 희석될 것이고, 그때 친박계가 당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는 한선교 의원도 "10년 넘게 박근혜를 팔아 호가호위하던 자들이 박근혜를 팔아넘겨 한자리 하려한다"며, "최경환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니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선거 패배에 자숙하자는 말은 그 안에 진정성이 있을 때 울림이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고개를 숙이고, 삼보일배를 하고 삭발을 한다고 해서 느껴지는 게 아닙니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급조된 사과와 쇼잉에는 국민들의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최경환 의원은 선거과정에서 진박 마케팅을 주도했던 장본인입니다.

진박 마케팅의 잘잘못을 따지자는게 아니라, 선거를 지휘했던 지도부로서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은 정치인의 기본 덕목입니다. 만약 최경환 의원이 유기준 의원을 설득하기 전에 ‘내가 먼저 전당대회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면 말의 무게가 달랐을 겁니다. 유기준 의원도 출마를 고집할 명분을 찾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계파적인 시각에서 정치 행위를 해석하는 게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새누리당 내부에서 그런 자기희생이 전제된 결단이 없이는 영(令)이 서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