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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충무공이 인쇄소 골목에서 태어났다고?

충무공 탄신일에 찾아가 본 충무공 생가터

[취재파일] 충무공이 인쇄소 골목에서 태어났다고?
우리 국민에게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대라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사후 4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그의 업적과 성품은 두말 할 나위가 없고, 드라마틱한 그의 삶은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매일 쓰고 있는 100원 짜리 동전에도 관복을 입은 충무공이 있지 않던가.

글을 깨치면서부터 이순신 전기를 읽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태어난 출생지를 묻는다면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많은 사람들은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 충남 아산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정답이 아니다. 그가 출생한 곳은 한성 4대문 안이다.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한성 건천동’에서 태어났다(‘충무공전서 9권 부록’). 건천동은 서울 남산과 청계천 사이에 있던 마을이다. 고지도를 통해 보면 좁고 길쭉한 지형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당시 건천동은 그리 큰 마을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 마을에 34 가구만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고지도 상 건천동의 위치
이순신은 15세 무렵 일가족이 모두 충남 아산으로 귀향가기 전까지는 건천동에서 살았다고 한다(‘유성룡 서애집 연보’). 건천동에서 뛰어 놀았고, 서당도 다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병진놀이(병사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조무래기들끼리 노는 것이었지만, 만약 어른이 자신의 진영을 넘어들어오면 ‘엄중히’ 꾸짖기도 했다는 걸 보니, 장수의 기질은 선천적인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의 절친인 유성룡도 어릴 적 동네에서 연을 맺었다. 유성룡 서애집에도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서울 장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아는 이가 별로 없었고, 오직 서애와 어렸을 때부터 동무로 지냈다. 서애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충무공이 장수의 기질이 있다고 알아주었다”고 말이다.

유성룡은 친구 이순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좋아했었나보다. 이순신은 건천동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유성룡과 유년기를 함께 보내면서 그의 문인적 소양도 쌓였던 것으로 보인다. 14~15년 살았던 곳 이지만, 이순신이라는 ‘인간’의 기본이 다져졌던 곳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은 남아 있지도 않은 건천동은 어디인가. 고지도에 따르면 건천동은 남산에서 내려온 긴 물줄기가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그 동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갑오개혁과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지명변경을 겪으며 건천동이라는 지명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 조선 때는 정확한 호적이라는 게 있지도 않았거니와, 한국전쟁까지 겹치며 그나마 있었던 기록들도 사라져 건천동이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56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와 한글학회가 고문헌과 고지도를 근거로, 현지 답사를 통해 충무공의 탄신지 고증에 나섰다. 전문가 10여 명이 일일이 옛 문헌에 나온 장소를 일일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은, 충무공의 탄신지인 건천동은 ‘중구 인현동1가 40번지’라는 것이다.

당시 답사단은 ‘향토서울’과 ‘동명연혁고’에 이런 내용을 실었다. 이후 지번 통합으로 인현동1가 40번지는 31-2번지 일대로 수정되었다(2005년). 지금은 인쇄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 안쪽이다. 실제로 이곳을 가보면, 규모가 꽤 큰 4층 건물에 인쇄소와 다방 등이 입주해 있다. 지금은 종이와 잉크 냄새가 물씬 나고, 인쇄물을 실은 트럭이 하루 종일 오가는 분주한 곳이지만, 500년 전쯤에는 어린 이순신이 뛰놀던 곳이었던 것이다.
현재 인현동1가 31-2번지 일대
서울시는 1950년대 고증을 토대로 1985년 이 동네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석을 세웠다. 사실 ‘인현동1가 31-2번지’와는 100여m 떨어진 명보극장 앞에 말이다. 옛 지도를 통해 보면 명보극장은 건천동이 시작되는 마을 초입쯤 되는 지역이다.

서울시는 왜 명보극장 앞에 표석을 세웠을까. 사실 인쇄소 골목 안쪽은 이미 작은 인쇄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유지인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그런 곳에 표석을 세우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큰 길가인 명보극장 앞에 두어야 많은 사람들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증을 통해 ‘인현동1가 31-2번지’라는 결론을 내기는 했지만,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정확한 지번을 알기는 어렵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충무로’, '마른내길‘이라는 지명을 통해 충무공이 살았던 건천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향토서울 제3호(1958.12.20 발행) 中
서울 한가운데 충무공이 태어난 장소가 있지만 지금은 표석만 남은 상태. 다들 일상이 바빠 제대로 들여다 보고 가는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매일 이 표석을 닦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30년 넘게 가판대 장사를 해 온 80살 이종임 할머니다.

1985년 표석이 세워진 이후 매일 아침 물과 수건으로 표석을 닦아주고 있고,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에는 술과 떡과 고기를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충무공의 일가도 아니고, 아무 연고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충무공처럼 위대한 분이 살았던 곳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채 표석만 남은 게 안타까워 보살피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건 충무공 같은 분이 나라를 지킨 덕분이라며 말이다.
충무공 생가터 표석 돌보는 이종임 씨
광화문 앞 광장에 가면 우뚝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을 보면 왠지 모르게 숙연해 지기도 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수한 세월 속에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앞으로는 충무로 인쇄소 골목을 지날 때에도 충무공이라는 인물과 그 업적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 도움말씀 주신 분들 : 서울역사편찬원 김도연 연구원, 여해고전연구소 노승석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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