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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당신은 이 비극에서 예외인가?

너무나 유명한 희곡이지만,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을 실제 무대 위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오래 전 원문의 형태로 희곡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만나니 느낌이 또 달랐습니다. 15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눈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공감과 연민이 그만큼 컸던 까닭입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20세기 미국의 걸출한 극작가인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대표작입니다. 191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밀러는 10대 때 경제 대공황을, 20대 때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습니다. 번영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미국 사회의 병들고 왜곡된 모습을 이토록 예리하게 포착해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건, 그에게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작업이었을지 모릅니다.
극의 주인공은 예순을 넘긴 세일즈맨 윌리 로먼입니다. 그는 양 손에 두 개의 커다란 샘플 가방을 들고 무대에 등장하는데, 이 모습은 그를 설명하는 아주 상징적인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축으로 돌아가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필요 이상의 욕망을 만들어내고 상품을 파는 세일즈맨이야말로 자본주의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직업 중 하나였을 겁니다.

윌리 로먼에게 당시 ‘미국 중산층의 전형적 인물’이란 지위를 부여한 건 그의 직업만이 아닙니다. 그는 참을성 있는 아내와 특별히 잘난 것 없는 평범한 두 아들을 둔 가장이기도 합니다. 자기 소유의 주택과 자동차를 소유했지만, 모두 장기할부로 사들인 것들입니다. 노후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놨지만, 할부금을 완납하기 위해선 아직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극은 이토록 평범한 인물, 주변에서 쉽게 볼 법한 인물인 윌리에게 닥친 슬픔과 절망, 혼돈과 회한을 그립니다. 35년을 바쳐 일해 온 직장에선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고, 기대를 걸었던 큰 아들은 자신이 도벽이 있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고백하며 아버지를 떠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한 때는 수당만 주당 170달러를 받으며 회사에서 인정받던 세일즈맨이었는데...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였던 고교생 아들은 대단한 사람이 될 게 분명해보였는데...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지 못한 채 그의 의식은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쯤 되면 잘 나가던 세일즈맨이 갑작스레 맞닥뜨린 외부의 충격과 시련을 극복하지 못해 좌절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과거에도 그렇게 많은 수당은 받아본 적도 없고, 그의 아들은 시험에 낙제해 고등학교 졸업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출장지에선 외도를 저지르는 정직하지 못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꿈과 행복은 애초부터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호경기가 지나고 욕망과 소비의 거품이 사라지면 그 많던 세일즈맨은 일자리를 잃고 자본주의 사회는 공황과 침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허상을 걷어낸 윌리 로먼의 삶이 비참해지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물질주의를 종교처럼 숭배하는 속물근성, 사회를 약육강식의 정글이라 부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는 야만성,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라면 그릇된 방법쯤은 눈감는 비겁함, 주변 사람을 무시하고 허세를 부림으로써 자존감에 위안을 받는 졸렬함...윌리 로먼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배금주의 사회가 빚어낸 작은 괴물이며, 이러한 삶의 태도가 그의 불행을 잉태한 원인이었음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그러나 이게 어찌 윌리만의 비극이겠습니까? 윌리 로먼이 겪는 비극의 양상이 오늘날 우리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고 고통스러운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한태숙 연출가는 대의를 위해 장엄하게 죽는 영웅도 아니고 사악한 의도나 목적을 지난 악인도 아닌, 사회 모순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가해하는 현실비극의 주인공인 윌리 로먼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라고 말합니다.

첫 장면에서 윌리가 내뱉는 “생각해 봐, 집 하나 사려고 평생을 일했어. 마침내 우리 집이 생겼는데,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거야”라는 탄식의 말은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 다! 그런데 그 집에 살 사람이 아무도 없네”라는 아내의 메아리로 되돌아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과연 이 비극에서 예외인가?’라고.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 또한 이 배금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작은 괴물이 아닌가?’
한태숙 연출의 손을 거쳐 무대에 오른 '세일즈맨의 죽음‘은 내내 무겁고 어둡습니다. 로먼가 가족이 사는 앙상한 구조물의 집은 뼈가 불거져 나온 노인의 손등처럼 거칠고 쇠락해 보이고, 주변을 둘러싼 높고 위압적인 아파트의 형상은 질식감을 유발합니다. 현재와 과거,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너져 내리는 인간상을 특별한 기교 없이 그려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그 자체로 비극적입니다.

이 비극적 인물들을 보며 느끼는 연민이 슬픔이 되고 그 슬픔이 다시 공포와 고통이 되어 우리를 엄습하는 과정을, 극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진=아서 밀러 원작, 한태숙 연출 '세일즈맨의 죽음'/ 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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