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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용선료의 덫'…생사 기로에 선 국적해운사들

[취재파일] '용선료의 덫'…생사 기로에 선 국적해운사들
● "용선료 인하 안되면 법정관리" 최후통첩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기업 구조조정 대책을 발표하며 "용선료 조정이 안되면 채권단이 선택할 옵션은 법정관리뿐"이라고 못박았습니다. 용선료 협상에서 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후의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밑빠진 독에 물붙기"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그만큼 해운사와 선주들 간의 용선료 인하협상에 이번 구조조정 작업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임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또 현재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용선료 협상에서 기업과 선주 모두에게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대상선은 이미 2월부터 용선료 협상을 벌이고 있는데 아직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임 위원장이 해외 선주들을 향해 "너희들 그렇게 배짱만 튕기고 용선료 인하 안 해주면 기업 문닫아 버릴 거다. 그렇게되면 너희들도 좋을 게 없다"라고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 용선료란 무엇인가?

용선(傭船)이라는 건, 말 그대로 '배 주인에게 임대료를 내고 배를 빌리는 것'을 말합니다. 땅 없는 농부가 소작료를 내고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죠.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두 개 해운사의 용선 비중은 전체 운영 선박의 60%를 넘습니다. 현대상선의 경우 전체 125척 가운데 68%인 85척을 선주에게 빌려서 영업하고 있습니다. 한진해운은 전체 151척 가운데 60%인 91척을 빌려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 '상투' 잡은 해운사들

흔히 부동산 투자에서 '상투를 잡았다'라는 표현을 쓰죠. 최고점에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이후 가격이 떨어지면 당연히 큰 손해를 볼 수 밖에 없겠죠. 구조조정이 진행중인 양대 해운사가 딱 그런 상황입니다.

해운업이 가장 호황이던 시기가 바로 2천년대 초·중반입니다. 일감이 많으니 운임이 높았고 그만큼 용선료도 높았습니다. 장사가 잘되니 해운사들은 저마다 더 많은 배를 굴리고 싶었겠죠. 너도나도 선박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10년 이상 장기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세계 경기침체로 운임은 최대 5~10분의 1로 떨어졌고 일감도 많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축구장 4개를 합쳐놓은 크기인 18만 톤급 벌크선의 경우 현재 하루 사용료가 1만4천 달러, 우리돈으로 1,600만 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이 배를 빌리기 시작한 2006년엔 10배나 높은 14만 달러에 달했다고 합니다.

매출은 늘지 않는데 비싼 배 사용료는 꼬박꼬박 줘야 합니다. 당연히 경영에 압박이 생기겠죠. 현대상선의 경우 지난해 매출 5조 7,000억 원 가운데 30%가 넘는 1조 8,700억 원을 용선료로 지급했습니다. 한진해운도 7조 7,000억 원 매출 가운데 1조 100억 원 가량을 용선료로 지급했습니다. 운임이 높을 당시에는 이런 용선료가 감당 가능했지만 지금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대부분 계약이 10년 이상 장기계약이라 물리지도 못합니다. 2020년을 넘어가는 계약도 있습니다.

때문에 정부도 용선료 협상을 다시 해서 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경영정상화가 힘들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채권단이 금융지원을 해봐야 다 용선료로 선주들에게 들어가고 실제 기업을 위해 쓰여지는 몫은 없다는 것입니다.

● 용선료 인하 가능성은?

용선료 협상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곳은 현대상선입니다. 5월 중순까지 결과를 도출한다는 계획을 잡고 막판 스퍼트를 내고 있습니다. 현대상선은 사업부문 임원 등 10여 명의 협상단을 꾸려 22개 해외 선주사를 찾아다니며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대상선은 과거 계약 당시 용선료와 현재 시세 차익의 50% 수준, 그러니까 과거 비쌀 때 계약한 용선료의 70%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것을 목표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진해운은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용선료 관련 구체적인 계획을 담은 자구안을 마련중에 있습니다. 주 채권은행인 산업은행에 자율협약을 신청했다가 보완 지시를 받은 것도 용선료 협상 계획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현대상선에 비해 시간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다음달을 용선료 협상 시한으로 제시하면서 법정관리를 언급한 것은 해외 선주들에게 용선료 협상에 보다 전향적인 태도로 임해달라는 압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배를 빌려 쓰고 있는 고객사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지금 받고 있는 용선료를 못받게 될 수 있으니 선주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또 현재 해운업이 불황인데다 선박 공급 과잉인 상황에서 다른 해운사에 배를 임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란 포석도 깔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해외 선주들도 용선료 용선료 인하에 응할 수도 있을 거란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외 선주들도 배 건조 비용이 높을 당시 많은 대출을 받아 선박을 건조했기 때문에 채권 은행의 동의도 받아야 하는 등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역시 존재합니다. 또 한국 국적 해운사들의 지금의 위기가 용선료 문제 보다는 경영상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배를 빌린 다수의 외국 해운사들도 한국 해운사들과 비슷한 수준의 용선료를 지불하고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선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용선료를 인하해줬을 경우 얼마나 경영정상화가 이뤄질 것이냐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기 때문에, 현재 양대 해운사들의 자구노력이 얼마나 선주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매주 중요합니다.

● 용선료 협상 이후에도 '산 넘어 산'

용선료 인하 협상이 성공하면 일단 한 고비는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용선료 인하 이후에는 사채권자 채무조정이라는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두 회사가 발행한 회사채 잔액은 3조 5천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금액만 현대상선 3,600억 원, 한진해운 2,210억 원에 이릅니다. 때문에 사채권자 집회를 열어서 채무 재조정을 받지 못한다면 용선료 인하를 통해 숨통이 트인 회사는 다시 유동성 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도 "사채권자 채무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금융 채권단(은행)만의 노력으로는 기업회생을 이끌어낼 재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 넘어야 할 산은 양대 해운사의 국제해운동맹 잔류 문제입니다. 현재 전세계 해운동맹이 '빅2'로 재편된 가운데, 제3의 해운동맹에 포함될 수 있느냐가 중요한 데 만약 해운동맹에서 이탈할 경우 구조조정 자체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세계 해운업계는 몇 개의 선사가 그룹으로 동맹을 맺어 항로 등을 조정하고 협력하며 함께 움직이는데 여기에서 이탈하면 독자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기존의 해운동맹 체제는 곧 만료되고, 내년 4월 새로운 체제로 재편하게 됩니다. 오는 6월 중에는 새로운 동맹체제가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데,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은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정상화의 가능성에 믿음을 줘야 동맹사들과 함께 새로운 동맹 체제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겁니다.

정부는 이때문에 동맹 측에 정부 명의의 서신, 이른바 'Comfort Letter'까지 발송한 상황입니다. 정부가 최선을 다해 두 회사의 경영정상화를 이끌어낼 테니 동맹에서 퇴출시키지 말아달라는 애원을 한 겁니다. 국적 해운사를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두 회사의 존폐 여부는 단순히 한 기업이 망해나가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수출입 관련 국내 전체 산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국적 해운사 없이 외국 해운사에만 수출입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떨까요?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겁니다.

● 생사 기로에서 '모럴 헤저드'

안타까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대주주의 '모럴 헤저드' 문제가 터져나온 겁니다. 정부는 책임을 묻겠다고 조사에 나섭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기업, 정부, 채권단 모두 똘똘 뭉쳐도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불투명한 판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재 출연 등의 성의를 보이며 경영 악화에 대해 대주주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도 될까말까한 판에 재를 뿌리는 행동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이며 얼마나 해외 선주들과 채권단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생사를 결정지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내달까지 용선료 못 깎으면 법정관리"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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