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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가습기 살균제' 수사에 대한 검찰의 자신감과 불안감

[취재파일] '가습기 살균제' 수사에 대한 검찰의 자신감과 불안감
 그냥 많고 많은 일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어젯밤 아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얘기를 나누다 "우리 집에서도 사용했던 제품"이라는 말을 뒤늦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고, 옆 방에 있던 두 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은 부지런한 엄마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아내의 자조섞인 말에 쓴웃음과 미안함이 함께 느껴졌습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보면서, 이건 비단 저 혼자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가 의문의 폐질환 사망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래 5년만에, 공정거래위원회가 가습기 살균제 제조 업체들을 고발한 지 4년만에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특별수사팀이 꾸려진 건 뒤늦게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수사 속보에 매달려 순간순간 무감각해지다가도 평생을 산소통과 호흡기를 달고 다니는 14살 임성준군의 모습을 볼 때면 이 사건이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인 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집계한 사망자, 피해자를 넘어, 자신이 피해자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숨졌을 사람들, 지금도 왜 고통받고 있는 지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이 사태를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요?

 늦게 시작한 이유를 차치한다면 지금 수사에 임하는 검찰의 모습은 대단히 의욕적입니다. 진작 좀 이렇게 하지라는 아쉬움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자신의 임기 중엔 가습기 살균제 수사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공언할 정돕니다. 그만큼 수사 의지가 강력하다는 걸 표현한 말이겠죠. 형사처벌을 할 피의자를 소환하기 전인데도 이미 수사 결론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도 쏟아냈습니다. 급기야 가장 많은 피해자를 양산해 낸 옥시의 영국 본사를 반드시 조사하겠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큰 소리쳤다는 검찰 관계자도 있습니다. 이쯤되면 수사에 대한 언급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검찰의 일반적인 태도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못해 이상할 지경입니다. 

 검찰의 이런 자신감의 표현은 보통 수사에 대한 지지 여론을 업고 싶을 때 쓰는 방법입니다. '수사란 살아움직이는 생물과도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수사를 진행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 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 지 예단하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압도적인 여론을 업고 가는 것은 수사의 안정적인 추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주요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할 때도, 만약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를 받는 사건이라면 법원도 부지불식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얘깁니다.(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 꼭 받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습기 살균제 수사는 오늘(26일) 신현우 전 옥시 대표이사를 소환 조사하는 단계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2001년 문제가 되고 있는 옥시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처음 출시할 때 회사 책임자였습니다. 신 씨와 함께 불려 온 사람들도 당시 PHMG인산염 물질이 포함된 국내 최초(엄밀히 말하면 세계 최초) 가습기 살균제 개발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3명을 한꺼번에 불렀다는 건 옥시가 가습기 살균제 출시 당시에 최소한의 유해성 검사를 했는지, 유해하다는 내용을 사전에 알 수 있었는 지 등이 이번 수사의 핵심이라는 얘기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신제품이 유해하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출시했다면 이건 과실범인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가 아니라 살인 혐의가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까지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건 검찰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검찰청에 나온 신현우 전 대표는 "유해성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검찰은 적어도 보통 사람의 주의력이라면, 자신들이 만든 가습기 살균제가 유해할 수 있다는 걸 의심해 볼 수 있었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이걸 입증하려고 이러 저러한 정황과 증거를 모으고 있는 일이 지금 검찰 수사팀이 밤낮 가리지 않고 하고 있는 일입니다.
옥시 신현우 전 대표
 결국 신현우씨가 검찰의 첫 사법처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신 씨에 대한 소환 조사를 마치면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이 보통의 예상 수순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이 이번 수사가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 지 가늠할 수 있는 첫 관문입니다. 검찰이 신 전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법률적인(?)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의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기준의 첫 번째 항목은 범죄에 대한 소명이 충분한 지 여부입니다. 본격적인 재판이 진행될 때와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검찰의 수사 내용이 일단 납득할 만한 수준은 돼야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검찰의 압도적인 여론몰이도 이 관문을 좀 더 수월하게 넘기기 위한 목적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고, 그와 별개로 수사가 얼마나 탄탄하게 진행됐는지, 말 뿐 아니라 내실도 갖췄는지 볼 수 있는 첫 시험대입니다. 만에 하나 신 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다면 수사는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큽니다. 검찰의 자신감은 단지 말뿐이었다는 얘기일 수 있으니까요.

 첫번째 관문인 신씨에 대한 구속이 검찰 바람대로 진행됐다면, 그 다음은 어느 정도 선까지 수사를 진행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쉽게 말해 옥시 영국 본사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수 있냐는 문제입니다. 현재 옥시 영국 본사는 한국 지사와는 법적으로 별개의 존재이며, 독립적인 회사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법적인 책임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검찰이 영국 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선 영국 본사와 한국 지사와의 소유 관계를 명확히 밝혀내고, 가습기 살균제 출시 단계부터 회수되기까지 기간동안 영국의 본사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입증해내야 합니다. 물론 가습기 살균제 개발 당시의 위험성 여부에 대한 보고나 지시도 있었는지도 입증돼야겠죠. 그러기 위해선 신현우 전 대표의 진술도 끌어내야 하고, 영국 본사에 대한 조사도 진행돼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과 영국의 사법공조가 이뤄진다해도, 검찰-한국 법무부-한국 외교부-영국 외교부-영국 법무부-검찰(영국 검찰은 공소유지를 담당하기 때문에 실제 수사를 한다면 영국 경찰과 진행할 것입니다)....이런 절차만 놓고 봐도 수사공조는 하시절이겠죠? 게다가 영국이 자국 회사에 대한 수사 협조를 순순히 허가할까요? 그렇다면 영국에 파견된 우리 경찰 영사관이 조사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이것도 주권 침해의 영역이라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일부 매체들은 우리 검사를 파견해 조사한다는 순전히 촉구성 기사를 쓰고 있지만 아이디어 차원의 조언 정도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검찰 수뇌부의 강력한 영국 본사 수사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사팀은 영국 본사 조사에 대한 요청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지는 않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뾰족한 묘안을 찾지 못하는 듯하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만약 기발한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그래서 영국 본사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지 못한다면...결국 몇몇 개인을 형사처벌하는 수준에서 수사가 마무리된다면...이 우울한 시나리오가 검찰의 자신감에 대한 저의 두번째 불안감입니다. 임성준군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여느 아이들처럼 놀이터에서 뛰어 놀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번 수사가 성준군을 놀이터에 갈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희망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은 되돌려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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