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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 대사] '4등'…“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

[이 영화, 이 대사] '4등'…“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
2011년 일이다. 지금은 ‘뉴스토리’라는 이름으로 바뀐 시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날 아침에 광화문 한복판에서 ‘대학 거부 선언자’들이 여는 집회에 취재를 나갔었다. 입시 위주의 경쟁사회를 거부하기 위해 스스로 대학을 거부하는 이들의 집회였다.
 
집회 참가자는 대부분 같은 시각에 수능을 치르고 있는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그날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제목이 ‘투명 가방끈’이다. 링크( ▶ 2011년 11월 15일 [현장21] 다시보기)를 열면 36분 40초 무렵부터 당시 방송된 프로그램을 다시 볼 수 있다.
영화 ‘4등’을 보면서 5년 가까이 지난 그 프로그램이 떠올라서 다시 찾아봤다. 보면서 올 수능일에 다시 틀어도 되겠다 싶었다.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서가 아니다. ‘입시’와 ‘성적’ 중심의 대한민국 사회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탓이다.
 
‘4등’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 12번째 작품이다. 초등학생 수영 선수인 준호를 주인공으로 운동선수에 대한 지도자의 폭력에 포인트를 맞췄다. 하지만, 폭력의 배경이 순위 경쟁이다 보니 우리 사회 전반의 1등 지상주의가 자연스럽게 함께 클로즈업 된다.
 
나가는 대회마다 4등만 하는 준호는 사실 꽤 뛰어난 아이다. 4등은 전체 가운데 무려 네 번째로 잘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코치는 수시로 몽둥이를 든다. 엄마는 밤마다 멍 자국을 들춰 보면서도 모른 체한다.
 
영화 ‘4등’은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폭력과 1등 지상주의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하지만, 무조건 어른들을 단죄하려 들지는 않는다. 매를 맞아가며 고된 훈련을 한 끝에 2등을 한 준호를 '거의 1등'으로 부르는 엄마의 모습은 오히려 관객들의 연민을 자아낸다. 손가락질만 하기엔, “나는 준호가 매 맞는 것 보다 4등하는 게 더 무섭다”는 엄마의 공포가 남의 일만은 아닌 탓이다.
 
5년 전 ‘투명 가방끈’을 만들면서 만났던 이들 가운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어머니가 있었다. 연년생인 딸과 아들이 잇달아 수능시험을 거부한 어머니였다. 몽둥이를 들어서라도 아이들을 시험장에 밀어 넣을 법도 한데,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뜻을 존중해서 그냥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을 거부하겠다는 아이들의 선택보다 이 어머니의 선택이 더 충격적이었다. 당시 방송된 기사에서 이렇게 적었었다. “듣다 보니 어머니의 머릿속이 더 궁금해 졌습니다.”
 
어머니에게 물었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신 건가요?” 같은 질문을 주변 사람들도 자주 한다고 했다.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그래요. 뭐가 그렇게 불안하냐? 너무 사회의 ‘몇 %’에 쫓겨가지 않으려고 해요. 욕심만 버리면 된다. 엄마의 욕심만 없으면 돼요. '편안하게. 쫄지 마라. 우리가 왜 쪼냐?' 저는 그런 식으로 웃으면서 얘기하거든요.”
 
당시 만났던 ‘아이들’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 이후 정규 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스물 한 살 청년도 있었다. 이 청년이 ‘초졸’로 살게 된 건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도예가인 아버지는, 그림 그리길 좋아하던 아들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용하는 색깔이 줄어드는 걸 보면서 학교가 아들의 상상력을 닫아간다고 느꼈다고 했다. 
 
아들은 학교를 그만 뒀지만 공부를 그만둔 건 아니었다. 주변 분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집에서 필요한 공부를 했다. 실제로 이 청년은 또래들이 여전히 대학에 다닐 나이에 지역사회 문화교육 사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번듯한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엔 필요한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해외 여행을 가기 위해 영어 학원에도 다니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검정고시는 보지 않았다. 대학을 갈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었다.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길은 어디에나 있고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물론, 아무리 길이 많더라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1등은 여전히 가장 편하고 빠른 길이다. 영화 '4등'은 그런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등만이 유일한 길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준호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정말 내가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좋겠어? 내가 1등만 하면 상관 없어?” 방점은 ‘1등’이 아니라 ‘맞아서라도’와 ‘만’에 있다.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상관 없어?”

‘1등’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위해 무엇을 어디까지 희생해도 좋은 걸까? 꼭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들에게만 필요한 질문이 아니다. 50이 됐든 60이 됐든,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가 평생 고민해야 할 질문이다. 올림픽에서 메달 많이 따는 나라가 아니라, 이 질문에 대답이 짧은 나라일수록 살만한 나라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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