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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름만 바꿔 땅 주인 행세…눈 뜨고 당한 사기

[취재파일] 이름만 바꿔 땅 주인 행세…눈 뜨고 당한 사기
'현대판 봉이 김선달'.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번 사건 만큼은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재력가 허 모 씨가 파주에 있는 수십억 원 규모의 땅을 싼 값에 내놨습니다. 

서류 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는 토지였습니다. 좋은 땅을 싸게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땅을 매입키로 한 사람들은 횡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기였습니다.

● "공시지가보다 싸게 팔게"…이름 바꿔 벌인 사기극

지난해 12월, 42살 권 모 씨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68살 허 모씨에게 솔깃한 제안을 들었습니다. 파주 출판단지 인근 임야를 싸게 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땅은 2만 5천㎡, 평으로 환산하면 7500평이 넘는 꽤 넓은 규모였습니다. 허 씨는 공시지가 60억 원 정도인 이 땅을 16억 원에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권 씨는 당연히 이 땅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거액이 오고 가는 계약인 만큼 허 씨와 함께 주민센터에 가서 등기부등본도 확인했습니다. 확인을 마친 권 씨는 계약금 1억 원을 허 씨에게 건넸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허 씨가 연락을 끊고 잠적했습니다.

똑같은 일이 지난 2월에도 벌어졌습니다. 이번엔 49살 유 모 씨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 씨 역시 파주 땅을 싸게 판다는 허 씨에게 계약금 3억 원을 전달했습니다. 잔금은 다음 날 치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허 씨는 계약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원이 꺼져있었습니다. 유 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등기부 등본을 확인했는데, 땅 주인이 허 씨로 되어 있어서 사기일 수 있다는 의심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비밀은 허 씨의 이름에 있었습니다. 확인 결과 두 번에 걸쳐 땅을 판 허 씨는 해당 토지의 소유주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주인과 이름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허 씨가 잡히고서야 범행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허 씨의 진술내용입니다. 허 씨는 원래 건설 관련 일을 했는데 빚이 많았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신설동에서 '박 사장'과 '오 사장'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허 씨에게 구권화폐를 유통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네요.

그러던 어느 날, "성이 허 씨라서 하는 말인데…"라며 개명을 제안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사람 중 허 씨 성을 가진 땅 부자가 있는데 잘만 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사장과 박 사장이 노린 건 1984년 7월 이전 작성된 등기부 등본에는 토지 소유자의 주민등록번호가 필수 기재사항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름만 같으면 땅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거죠. 이들은 허 씨에게 땅 주인 행세를 해 주면 2억 원을 준다고 제안했습니다.

빚에 시달리던 허 씨는 범행에 가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들은 범행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법무사 사무장까지 동원했습니다. 개명신청은 법원에서 쉽게 받아줬습니다. 허 씨는 그렇게 파주에 있는 땅 2만 5천㎡의 주인으로 둔갑했습니다.

● '오 사장' '박 사장'은 가상의 인물?

허 씨가 계약금 명목으로 받은 돈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4억 원이었습니다. 허 씨는 이 돈 가운데 1억 5천만 원만 챙겼다고 진술했습니다. 이 돈으로 빚을 갚았고, 유흥비로도 썼다고 말했습니다. 나머지 2억 5천만 원은 오 사장과 박 사장에게 보냈다고 주장했습니다.

허 씨를 체포한 경찰은 오 사장과 박 사장 추적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수사를 하면 할수록 허 씨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들이 발견됐습니다. 오 사장과 박 사장이 자신을 만날때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늘 장갑을 끼고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화 연락도 공중전화로만 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들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두 사람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 씨의 금융 계좌에서도 이상한 자금 흐름이 발견됐습니다. 오 사장과 박 사장에게 줬다는 2억 5천만 원이 현금 형태로 빠져나간 겁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허 씨가 말한 오 사장과 박 사장이 가상의 인물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떠넘기고 범죄 수익을 은닉하려고 가상의 공범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경찰은 허 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지난 4일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수사는 이제 검찰의 몫으로 넘어갔습니다. 사기의 규모는 크지 않은 사건이지만, 정말 공범이 있는지만큼은 반드시 확인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같은 수법의 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 개선도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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