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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음유시인' 김광석 20주기…"그대 잘 가라"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과제로 독후감을 써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일이 계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30대 젊은 국어선생님이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를 부르시더니 시집 한 권을 주셨어요. 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제겐 쉽게 읽히지 않는 시집이었습니다. 단 한 번에 폐부를 찌르지 않는 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 시집도 그랬습니다. 소설을 좋아하던 16살의 제게, 시는 때론 빈 공간이 너무 많아서 그 곳에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 지 난감하게 만드는 장르였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다시 찾아본 건 ‘가수 김광석’의 노래 때문입니다. 많이 아시는 것처럼, 고인의 유작 ‘부치지 않은 편지’는 정호승 시인의 동명 시를 노랫말로 만든 곡입니다. 떠날 당시, 고인은 시인이자 가수 겸 작곡가인 백창우 씨와 함께 <노래로 만나는 시>라는 앨범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는 고인의 20주기입니다. 1996년 1월 우리 곁을 떠났으니, 그 때 누군가가 태어났다면 벌써 성인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올해도 ‘추모’의 이름을 단 공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책 출판도 끊이지 않고, 전시도 새로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주 고인의 추모 전시에 다녀왔습니다. 고인의 육성을 딴 오디오가이드가 특징이었는데, 생전 공연실황을 녹음한 자료에서 일부 발언을 편집해 만든 겁니다. 관련 기사를 쓰며 그 녹음 자료들을 듣고 또 듣다보니 절로 마음이 울컥해졌습니다. 그 따뜻한 음성이 주인 없는 목소리라니, 그것도 아주 오래전 주인 잃은 목소리라니 헛헛함이 밀려듭니다.

"이 곡 부를 때면 꼭 저희 큰 형님 생각이 나요. 큰 형님 군에 가실 때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는데. 11년 차이 나니까요. 근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입고 갔던 사복을 집으로 소포로 보내옵니다. 그게 노란 잠바였는데, 가을에 가셔서 노란 잠바였는데, 집에서 어머님하고 펌프 해가지고 빨래를 했었거든요. 펌프를 저어준다고 젓고 있는데 어머님이 뭘 보시더니 막 우세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잠바 뒤에 상표 있는데다가 ‘어머니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써놨었나 봐요. 어머니 막 우시는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이병으로 입대를 해서 대위까지 올라 가셨었죠, 큰 형님이. 대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문에 저도 혜택 받아서 짧게 다녀올 수 있었지요. ‘이등병의 편지’ 보내드리겠습니다."
- 1992년 8월 8일 학전 공연 中

"<상실의 시대> 많이들 읽으시죠, 요즘에?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오더라고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적 자아의 무게를 책임짐과 동시에 외적인 사회의 무게에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라는. 참 공감이 가고 좋은 글이다 생각을 했는데, 앞부분은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는데 뒷부분이 영 안 되더군요. 객관화시켜놓고 보니까 제가 도둑놈이고요, 나쁜 놈이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지나가면서 어떤 조건이나 이런 것들을 따져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 모습도 어차피 사랑하는 모습이다’라고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노래 부르는 제 느낌이 좀 다릅니다, 예전에 부를 때와는. 뭐 아쉬워해야 할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외사랑’ 보내드릴게요."
- 1993년 7월 4일 학전 공연 中

"여행이나 살아가는 거나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 힘들고 그러더라도 뭔가 좀 새로운 게 있겠거니 기대하면서 견뎌냅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쑥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기대감 때문에 결국은 또 행복해하기도 합니다. 그런 불안한 기대에 관한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보내드릴게요."
- 1995년 8월 18일 학전 공연 中
가족, 사랑, 삶에 대한 그의 여러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대체 불가능한 가수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음유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가수가 아닌 자연인으로서도 무척이나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 가수는 참 여리고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 안에 고민도, 아픔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살아남아 더 많은 시를 노래에 담아 들려줬다면 저는 보다 일찍 더 많은 시를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지나쳐버린 아름다운 곡들을 찾아내 그가 자신의 음성으로 불러줬을 때 그 곡들이 이토록 긴 생명력을 얻게 된 것처럼, 그가 더 많은 시를 들려줬다면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시를,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더 많이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20년이 지나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사그라들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면 그가 들려준 시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 붉게 물들어 내일을 기약하는 저녁노을은 그저 아쉬움입니다. 익숙함으로 쉽게 인정해버린 일상의 자잘한 부분까지 다시 뒤집어보고 내 걸어온 길들의 부끄러움을 생각합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나날들, 내 뒷모습을 말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던 세상살이가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부대끼는 가슴이 아립니다. 읽다만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내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듯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노래의 참뜻을 생각하니 또 한 번 부끄럽습니다. 지난 하루의 반성과 내일을 기약하며 쓰는 일기처럼 되돌아보고 다시 일어나 가야할 길을 미련 없이 가고 싶었습니다. 세수를 하다말고 문득 바라본 거울속의 내가 낯설어진 아침,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다시 불러 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 1993년 2월 6일 김광석 / <다시부르기Ⅰ> 앨범 속 글
           

(사진=김광석을보다 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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