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미친 땅값'에 설 곳 잃어가는 '제주 4.3 유적지'

[취재파일] '미친 땅값'에 설 곳 잃어가는 '제주 4.3 유적지'
10년 전 3.3㎡ 당 3천500원에 매입한 땅이 있습니다. 이 땅의 현재 가격은 최대 30만 원에 육박합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의 주인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누군가 제게 이 질문을 한다면 저는 이런 고민을 할 것 같습니다. ‘당장 팔아서 목돈을 만들까?’ 아니면 ‘가격이 더 뛸 때까지 묵힐까?’

여기에 한 가지 참고 사항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땅이 유적지입니다. 68년 전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무참히 희생된 4.3 사건 당시의 흔적이 남은 유적이 포함돼있습니다. 그런데 유적이 남아있을 뿐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즉, 땅 주인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주시 한림읍 진동산 '뒷골장성'터
●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뒷골장성’

뜬금 없는 질문 같지만 사실 실제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주시 한림읍 상대리 진동산 자락에 있었던 ‘뒷골장성' 터의 사례인데요. 먼저 뒷골장성에 대해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4.3 사건 당시 군과 경찰이 주민과 무장대를 분리하기 위해 쌓았던 10km 길이의 장성(長城)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뒷골장성입니다. 성담(돌로 쌓은 성(城)의 담)을 쌓아서 담 안에서는 주민들을 통제하고, 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폭도로 규정해 학살했습니다. 주민과 무장대를 분리해 토벌하기 위한 정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0년 전,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단이 조사에 나섰을 당시만 해도 길이 1km, 높이 4m 정도의 성담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고, 지금 이 곳에선 주택을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입니다.

지난 1일, 이곳을 직접 가봤습니다. 주택을 짓기 위한 기반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공사를 위해 땅은 굴삭기로 이미 갈아 엎었고, 조경용으로 보이는 큰 바위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곳이 4.3 사건 유적지라는 안내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뒷골장성' 터가 어딘지, 그때 쌓았던 돌담은 어디 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4.3사건 생존자이자 인근 마을 주민인 이종훈 할아버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수풀이 우거진 안쪽까지 들어가 돌무더기가 쌓인 언덕을 넘어가니,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 사이로 50m도 채 남지 않은 뒷골장성의 남은 구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마저도 담 대부분이 훼손되고, 땅 소유주에 의해 중간이 뚝 끊긴 모습이었습니다.
제주 서귀포실 영남동 '잃어버린 마을'
● 제주 4.3 유적지 대부분 사유지…개발 제한할 명분 없어

유적지가 훼손된 사실은 가슴 아프지만 땅 주인을 비판하거나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엄연히 사유지이고, 땅 주인은 자신의 땅을 원하는 대로 처리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뒷골장성' 터가 포함된 땅도 지난 세월 동안 주인이 몇 차례나 바뀌었습니다.

제주도 부동산 개발 바람이 불면서 10년 사이 이곳의 땅값이 100배 가까이 뛰었기 때문입니다. 제주 전역은 도심이고 논밭이고 할 것 없이 최근 2-3년 사이 평균 2배 이상이 올랐다고 합니다. 취재진과 만난 뒷골장성 터의 현재 소유주는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지금 다 땅 분양해서 토지주가 다릅니다. 유적이 어디 있어요. 땅 파도 아무 것도 없어요.” “여기는 사유지입니다. 내가 내 땅에서 집을 짓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도청이 파악하고 있는 제주 4.3 유적지는 597곳 입니다. 이중 보존 가치가 높아 주요 정비 대상으로 지정된 곳이 18곳입니다. 하지만 18곳 중에서 제주도청이 국유지로 매입해 관리하는 곳은 3곳에 불과합니다.

보존을 위한 국비 지원도 끊긴 상황이라 국유지 매입은 더욱 어렵습니다. 유적 보존을 위해 소유주가 땅을 기부한다면 좋겠지만, ‘미친 땅 값’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토지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땅을 선 뜻 내놓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4.3 사건 이전의 제주도민의 삶에 대한 역사자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6년 간 이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불타고 소실된 겁니다. 4.3 사건 생존자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4.3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100배 오른 땅값…'학살당한 비극 현장' 사라진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