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가면 타악기는 주로 맨 뒤편 구석에서 전체 연주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죠. 그런데 이런 타악기를 무대 가장 앞자리로 끌고 와 전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여성이 있습니다.
얼마 전 내한공연을 가진 스코틀랜드 출신의 퍼커셔니스트 에벌린 글레니인데요, 그녀는 초등학교 때 이미 청력을 잃어버린 청각장애인입니다.
단순히 장애를 딛고 음악가가 됐을 뿐 아니라 타악기 음악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곽상은 기자가 만나고 왔습니다.
콘서트홀이 은빛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에벌린 글레니의 카리스마로 가득 찼습니다. 벼락이 내리치듯 강렬하게 몰아치는 북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고 현란한 마림바 연주는 곡에 또 다른 매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합주를 뚫고 터져 나오는 타악기의 힘찬 리듬은 청중들의 마음을 빼앗았는데요, 그녀는 두 개의 귀 대신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소리를 진동으로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더 대단한 건, 장애를 극복한 것에서 나아가 자기 분야를 스스로 개척했다는 점입니다.
70년대 후반만 해도 콘서트에 협연자나 독주자로 나서는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는 많았지만, 솔로 퍼커셔니스트란 직업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레퍼토리를 늘리기 위해 직접 작곡가들을 찾아가 타악기가 중심이 된 연주곡들을 의뢰했고 무대에 설 기회를 만들기 위해 프로포터들을 설득했습니다.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갖고 그 의지를 현실로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겁니다.
그녀는 자신이 장애를 장애라고 생각지도 않는다면서 자신의 한계를 쉽게 단정 짓지 말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일단은 시도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에벌린 글레니/청각장애인 타악기 연주자 : 뭐든지 해 보는 게 중요해요. 제가 12살 때 타악기에 호기심이 생겨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것처럼요.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민하진 않았어요. 단지 한 번 시도해보자! 그뿐이었어요.]
그녀는 향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모아 듣는 걸 가르치는 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대충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당신만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란 태도로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고 스마트폰이나 시계 따위에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는 것이 진짜 잘 듣는 거라고 강조했는데요, 장애가 없는 우리들은 어떤가요?
혹시 장애를 가진 그녀보다 더욱 도전 앞에서 망설이고 세상을 온전히 듣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 [취재파일] "두드려라!"…'멋진 연주자' 에벌린 글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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