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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두드려라!"…'멋진 연주자' 에벌린 글레니

‘맨발의 연주자’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출신 퍼커셔니스트(타악기 연주자) 에벌린 글레니(Evelyn Glennie)가 지난주(3월 25일) 내한공연을 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진행된 리허설 현장에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콘서트홀에 들어서자마자 은빛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연주가 시작되자 그녀의 카리스마는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벼락이 내리치듯 강렬하게 몰아치는 북소리가 듣는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더니, 현란한 마림바 연주가 곡에 또 다른 매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본 공연이 아닌 연습에 불과했지만,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뚫고 터져 나오는 타악기의 힘찬 리듬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리허설 내내 무대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서른 개 가까운 타악기를 연주했습니다. 보통 오케스트라 연주에선 잘 쓰지 않는 악기들이 많아, 협연단체에서는 이번 공연을 위해 새로운 타악기를 여러 개 새로 제작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제 보니 ‘맨발의 연주자’란 별명에 대한 설명을 빼먹었네요. 이 별명은 소리의 진동을 더 잘 느끼기 위해 무대에서 신발을 신지 않은 채 연주를 해서 붙여진 겁니다. 그녀는 두 귀 대신 온 몸의 감각을 동원해 소리를 진동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연주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에벌린 글레니, 그녀는 사실 청각장애인입니다. 어렸을 때 앓았던 볼거리 후유증으로 8살부터 12살 사이에 서서히 청력을 잃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청각장애를 딛고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다니,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 대단한 것은 그녀가 ‘자기 일을 만들어서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할 당시인 70년대 후반엔 ‘솔로 퍼커셔니스트’란 직업(full-time solo percussionist)이 없었다고 합니다. 콘서트에 협연자나 독주자로 서는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는 많았지만, 그런 식의 타악기 독주자는 없었다는 거죠. 타악기는 오케스트라 맨 뒤편에서 효과음 정도를 내는 악기란 인식이 많았던 때니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했냐고요? 말 그대로 그녀는 자기 일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프로모터가 솔로 퍼커셔니스트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설득해 무대에 설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고, 타악기가 중심이 된 연주곡이 턱없이 부족하자 직접 작곡가들에게 의뢰해 자신이 연주할 만한 곡의 목록을 늘려나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분야에서 역사를 새로 쓴 연주자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그녀를 ‘청각장애를 극복한 연주자’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녀가 이룬 성취 일부분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그 의지를 현실로 만든 건 부단한 노력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놀란 건 그녀의 도전이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향후 활동 계획을 묻는 말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듣는 걸(to listen) 가르치는 센터'를 설립하겠다는 대답을 내놨습니다. '듣는 법(how to listen)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듣는 것 자체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강조한 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곳을 만들고 싶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제대로 듣는 것’은 대충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녀는 단언합니다. “듣는다는 건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건 내가 이 순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오직 당신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컴퓨터나 휴대전화, 시계 따위에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는 겁니다. 말 그대로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거죠.” 귀가 들리지 않아 외부의 소리를 받아들일 때 온 감각을 집중해야 했던 그녀의 남다른 경험이 그녀를 장애가 없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잘 듣는 사람‘으로 만든 셈입니다. 

쉽게 자신의 한계를 단정 짓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그녀가 일갈할 땐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무엇이든 당신이 믿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나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강한 의지가 있다면 말이죠. 원하는 걸 시도해 보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에벌린 글레니를 취재하며 그녀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 좋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관객에게는 물론 인터뷰를 하는 이에게도 영감을 주는, 그런 멋진 연주자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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