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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족보…권력을 쥔 사람들의 칼질

[칼럼] 족보…권력을 쥔 사람들의 칼질
1930년 대에 가장 많이 출판된 책은 어떤 종류의 책일까? 소설, 잡지, 시집?

답은 족보다.1932년 통계를 보면 소설책이 132종, 시집은 75종이 출판됐는데 족보는 151종이 출판허가를 받아 단연 1위다. 족보는 1931년에도 137종이나 줄판돼 입도적인 1위다. 1930년대는 '족보의 홍수' 시대였다.  

양반 상놈의 구별이 제도적으로 폐지된 지 30년이 훌쩍 지났고 나라가 망해서 나랏님의 존재도 사라진 시대,
조선이 근대의 경계를 넘어 현대의 모양새를 띠기 시작하던 때가 1930년대인데, 왜 그 때 봉건과 구시대의 상징 같은 족보가 그리 많이 출판되었을까?

족보 출간 유행은 그 시대에도 여전히 혈연적 유대가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 믿을 것은 가족 뿐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족보의 번성은 망해가는, 사라지는 구 시대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일 수 있다. 제도적으로 보면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그럴수록 우리 집안은 뼈대있는 집안임을 강조하고 싶은 심리도 있었을 테고, 모든 것이 급격하게 바뀌는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자신의 뿌리를 족보를 통해 확인하려는 몸짓이기도 했다.

그 혼란을 이용해 자신의 뿌리를 만들어내거나 세탁하고 싶은 사람들도 족보 출간 바람에 일조했을 것이고.
나라 잃은 허전함을 집안의 뿌리 찾기로 채우려는 사회적인 욕구, 나라는 잃었지만 집안이 망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족보 홍수 시대의 사회적 배경으로 지적될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떻든 30년 대의 족보 출간 유행은 한국사회에서 뿌리 찾기에 대한 열망은 한국인의 DNA에 강하게 아로새겨져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준 유행이라고 할 수 있다.

족보를 연구하는 譜學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족보 논쟁으로 정권이 바뀌고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쟁투를 벌이기도 했던 나라가 아닌가?

할아버지에 아버지에 그 아버지에를 따져 中始祖, 開始祖를 따지고, 저 분과 나는 몇 촌이고 어느 대에서 어떻게 분가가 이루어졌는지, 또 집안의 몇 대조 할머니는 어느 집안에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족보.
이런 족보가 요즘 정치권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누구는 누구와 어떤 인연이 있고, 저 사람은 누가 챙기고 있고, 저 사람과 저 사람은 30년 전에 어떤 악연이 있는지, 심지어는 저 사람의 선친과 누구는 무슨 일로 앙숙이 되었는지까지 따진다. 정치적 족보인 셈이다.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공천
요즘은 친노다 비노다, 비박이다 친박 아니 진박이다 같은 족보가 정치인의 생사 결정에 가장 중요한 기준인듯하다. 정치적 계보라는 말로 표현은 바뀌었지만 족보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친노의 좌장이라는 이유로 6선 경력의 전직 총리가 공천에서 떨어지고, 권력자에게 고개 빳빳하게 든 사람 편에 섰다는 이유로 낙마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사실 정치를 바라보는 가장 큰 재미는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다. 공당의 공천 과정을 통해 그 당의 변화 의지를 가늠하고 그 당이 어디로 가려하는지, 그당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유권자들은 판단한다.

그래서 정당의 공천은 민의를 수렴하고 이를 대변하는 중요한 정치 행위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인물의 교체를 통해 변화를 실감하고 권력의 무서움을 체감하기도 한다. 특히 한 시대를 주름잡던 실력자들이 단칼에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통쾌함, 분노, 비감 등 여러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것이 권력이고 정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 바꾸는 것이 지나치게 정치적 족보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보니 객관적 기준보다는 자의적으로 공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의문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으면 정치적 학살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여야의 공천을 유권자들은 정당한 절차에 따른 민의의 대변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쥔 사람의 칼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진정한 심판은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다음달 13일 유권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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