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찾아와서 정말이지 할 말이 없고 미안하오. 부디 내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나는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지난 13일 국립 3ㆍ15묘지를 찾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김주열 열사 무덤 앞에서 섰다.
꿈에서도 다시 보기 싫은 '그 일'에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간지 56년 만이다.
청년 '김주열'의 사진이 들어있는 작은 비석을 쓰다듬으며 난 진심으로 그에게 사죄했다.
내 평생을 옥죄었던 56년전 그 일을 떠올리자 눈 앞에 그의 시신이 있는 듯 온 몸이 떨렸다.
난 1960년 3ㆍ15의거 당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 열사 시신을 바다에 버리는데 동원된 지프를 운전했다.
역사 속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게 내 운명이었다.
내 이름은 김덕모, 마산에 사는 76살 먹은 노인네다.
1960년 당시 20살이었던 나는 경찰 간부를 하다 사업을 하던 큰형님 운전기사에게서 운전기술을 배웠다.
평소 공수도 등 운동을 해 덩치가 컸던 탓에 선배 권유로 반공청년단에도 가입했다.
반공청년단 가입 후 지프에 경찰을 태우고 다닌 일도 몇 번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운명의 그날도 경찰을 태우고 시위현장을 다녔다.
당시 마산경찰서 박모 경비주임(당시 경위)을 태우고 다니며 경찰관들이 이승만 정권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는 것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뒷날 새벽까지 박 경위 등 경찰 3명과 민간인 1명을 태우고 다녔다.
이들은 중간에 마산세무서로 가자고 했다.
세무서 탱자나무 담장 도랑에는 교복을 입은 청년 1명이 반듯이 누워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의 시신이었다.
뜻밖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경찰이 지프에 시신을 실을 동안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3월 중순이지만 그날은 꽃샘추위 탓인지 유난히 날씨가 추웠다.
차에 탄 경찰 등은 처음에 가까운 산으로 가자고 했다.
해안가를 달리고 있을 때쯤 그들은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했다.
날씨가 추운데다 동틀 녘이 다가오자 이들은 마산항 1부두 확장공사를 하는 곳에 시신을 버리자고 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이들은 해안 매립에 쓰는 돌을 묶어 놓은 철사를 맨손으로 끊기 시작했다.
나도 이들을 도와 철사를 끊는 작업을 했다.
그 뒤는 너무 두려워 차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들은 김 열사 시신과 돌을 철사로 묶더니 바로 바다로 던졌다.
그런데 시신을 버린지 27일만인 4월 11일 애초 시신을 던진 장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시신이 떠올랐다.
그때서야 내가 옮겼던 시신이 시위 도중 실종된 '마산공고 1학년 김주열 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국회 진상조사단을 피해 마산에서 진주로, 또 부산으로 수배 중인 경찰과 함께 피신을 다녔다.
피신을 다니면서 경찰과 시험을 치듯 그날 일에 대해 입을 맞췄다.
자수하라고 누가 권해서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고, 또 입대를 하라고 해 군대로 갔다.
시신을 유기하는 데 도움을 준 이후 일은 시간이 많이 지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1960년 3월 15일 이후 매년 3월 15일이면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경찰이 쏜 화염병을 맞은 고등학생이 숨졌는데 그 일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반평생을 넘게 함께한 아내에게도 차마 김 열사 시신을 유기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후 하루하루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원래 불교를 믿고 있었지만, 주변 친구 권유로 30대 중반부터는 성당을 나갔다.
성당에서 김 열사가 천국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묵주기도를 했다.
하지만 기도로는 양심의 죄를 씻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죄를 씻으려 장례를 돕는 성당 봉사단체인 연령회에 가입해 다른 사람 시신을 닦는 봉사활동을 했다.
30대 중반 젊은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이라며 주위의 만류가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속죄하며 살고 싶었다.
이렇게 40년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다.
오랜 시간 봉사하며 살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죄책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벌을 받은 걸까.
12년 전 넘어지면서 뇌를 다쳐 뇌병변 2급 장애 진단을 받았다.
또 최근에는 치매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일'이 있은 후 난 남들이 다 좋아하는 봄이 싫었다.
3월 15일부터 김 열사 시신이 떠오른 4월 11일 사이 피는 벚꽃은 더 싫었다.
이 시기에는 유난히 죽은 김 열사의 얼굴이 더 떠올랐다.
이렇게 지내던 중 지난해 우연히 라디오에서 김주열열사 기념사업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죄를 지었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여태껏 사과도 못 했지만, 이제는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 뒷날 바로 사업회를 찾아갔고 상의 끝에 따뜻한 봄이 오면 김 열사 무덤 앞에서 사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시간이 지나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56년이 지난 3월 13일 병든 몸을 이끌고 김 열사 무덤 앞에서 섰다.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무덤 앞에 서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홀가분해졌다.
김주열 열사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했다.
이런 마음을 먹은 뒤에야 비로소 아내에게도 진실을 털어놨다.
이제 곧 딸들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말할 생각이다.
매년 4월 11일이면 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마산항에서 4ㆍ19혁명 발원지 문화재가 열린다고 한다.
건강이 허락되면 올해는 꼭 참석해 김주열 열사에게 다시 한 번 사죄할 생각이다.
(연합뉴스)
"김주열 열사에 속죄하는 맘으로 시신 닦으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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