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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일본 노인들의 홍대 '스가모'를 가다

'스가모'…노인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유

일본 도쿄 중심부의 JR 스가모역 앞에 있는 오래된 레코드 가게 앞에선 거의 매일 오전 11시쯤 부터 특이한 공연이 펼쳐집니다. 제가 취재를 갔던 날엔 가냘픈 몸매의 23살 가수 미타 쿄우카씨가 지나가던 손님을 관객삼아 신곡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발표한 신곡 2곡을 부르겠습니다. 먼저 '손자의 노래' 입니다. 박자가 느리고 가사가 쉬우니까, 어르신들 오늘 배워가세요~"

곧이어 흘러나오는 노래는 엔카(일본 전통가요)였습니다. 어느새 주변에 몰려든 4~50명의 길거리 관객들은 거의 모두 노인들이었습니다. 익숙한 음정이라 느꼈는지 그 자리에서 음을 따라하고 박수를 치고, 레코드 가게 앞은 엔카 가수들에겐 새 음반을 낼 때면 꼭 찾아야 하는 무대가 됐습니다. 미타 쿄유카씨의 말입니다.

"스가모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계십니다. 제가 부르는 엔카는 이런 분들이 공감을 많이 해주세요"

레코드 가게 안엔 한 벽면이 모두 엔카 테이프로 들어차 있습니다. 오래된 LP판도 많습니다. 오히려 CD 음반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공대를 졸업하고 전기 기술자였다는 레코드 가게 주인 고토 코헤이씨(47)는 디지털 보다는 아날로그 소리가 훨씬 정감이 있어 일부러 이 가게를 운영해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 고객은 물론 '노인'층이라고 했습니다.

"주로 어르신이 주 고객입니다. 어르신들이 젊었을 때 불렀던 노래, 그리운 멜로디를 주로 찾아요"

전 잘 모르지만 미카와 키요시, 시마즈 아야 등 이미 일본에선 유명 스타가 된 엔카 가수들이 무수히 이 레코드 가게 앞에서 공연을 했었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젊은 세대가 노년 세대에게 인정 받아보려 모이는 곳. 노인이 중심인 거리. 이 곳이 바로 이 레코드 가게부터 이어지는 일본판 노인들의 홍대 '스가모 거리'입니다. 전철역과 지하철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노인들 일색이었습니다.

1km 정도 쭉 뻗은 거리 양옆으로 200여개의 상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는 물건들이 대부분 옷과 음식들이었습니다. 어릴 때 자주 봤던 빨간 내복부터 일바지(일명 '몸빼'라고 하죠), 그리고 눈깔사탕과 일본식 과자(센베)...시간이 30~40년 전에 멈춰버린 듯한 상점가 풍경이었습니다.

스가모가 유명하게 된 것은 길 도입부에 있는 '고간지'라는 절 덕분이라고 합니다. 5백년 넘은 사찰인데, 장수를 기원하는 불상(토게누키지조; 가시를 뽑아주는 지장보살)이 있고, 절 한 가운데 있는 향불의 연기를 쐬면 건강에 좋다는 믿음이 퍼져 있다고 합니다.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절을 찾는 노인들이 상점에 들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노인 중심의 상점가가 형성됐다는 겁니다.

스가모 상점가가 노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우선 노인용품 위주의 상품 배열입니다. 손에 익고 눈에 익숙한 물건들이 비교적 부담없는 가격에 팔립니다. 돋보기 안경과 지팡이도 귀중하게 모셔져 팔립니다. 음식도 예전부터 노인들 입에 익었을 듯한 것 위주로 팔립니다.

특이한 것은 이런 상품들의 이름이나 가격표가 크게 쓰여 있다는 겁니다. 눈이 좋지 않은 노인 고객을 위한 '배려' 입니다. 그리고 '영어'는 전혀 없습니다. 일본 고유 문자인 '히라가나'나 '한자' 위주입니다. 역시 노인 배려입니다.

상점가 입구엔 문이 따로 없습니다. 문턱을 없애버린 겁니다. 영업이 끝나면 위에서 셔터를 내려 잠근다고 합니다. 길거리에서도 도로와 인도의 턱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상점들에도 턱이 없다는 데서 정말 '일본다운 세심함'이란 게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길거리는 물론 상점 안에는 유난히 의자들이 많았습니다. 다리 아프면 앉아 쉬라는 건데, 심지어는 탈의실 안에도 의자가 있더군요.

상점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 가운데 노인들이 상당수였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3대째 스가모 거리에서 전병 가게를 운영해 왔다는 사토 노부에씨(75)는 노인 고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비결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친절입니다. 노인 고객들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합니다. 저도 노인이라서인지 왠지 손님들 기분을 자연스럽게 잘 알 수 있어요"

취재 도중 길에서 만나 인터뷰를 한 멋쟁이 할머니 미야모토 노부코(72)씨는 이 거리에 오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습니다.

"쇼핑하기가 편해요. 쇼핑은 오모테산토(도쿄 명품거리, 우리나라 청담동 분위기)에도 갈 수 있지만 여기가 제 나이에 맞는 곳이란 느낌이 들어요. 노인들의 하라주쿠나 긴자라고 할까요..호호"

역시 올해 72살인 스가모 상점가 진흥회 이사장인 키지키 시게오씨는 노인 종업원의 장점을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가게 종업원이 노인들이면 노인 고객들은 마음이 놓여요. 옛날 방식으로 물건 보고 종업원에게 푸념도 해가면서 쇼핑을 할 수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물건 살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거리가 발전하면 할수록 노인 일자리 역시 자연스레 늘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거리가 노인들만의 거리는 아닙니다. 물론 노인이 주인공이지만, 이런 특이점이 알려지면서 연간 9백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습니다. 젊은이부터 중장년들은 이 곳 스가모의 노인들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힘을 얻어간다고 했습니다.

취재팀의 현지 가이드로 도움을 줬던 야마다씨(49)도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꼭 모시고 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고향에선 스스로를 힘없는 노인네 취급하는 어머니가 만약 이 곳을 찾아본다면 왠지 다시 '젊어질'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세대간 장벽까지 허물고 있는 스가모 거리는 이젠 일본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관광명소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키자키 시게오 진흥회 이사장의 말입니다. "지금도 한국이나 중국, 타이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저희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젠 그 나라 말로 다국어 지도를 만들어서 배포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도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65세 이상 노년층은 13.5% 수준인데, 2040년엔 전체 인구의 32%를 넘어설 전망입니다. 25년 뒤면 전국민 10명 가운데 3명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의 노인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요. 뒷방에 있는...일자리 없는...희망이 없고 생기도 없는...가족과 아랫세대들에게 짐이 되는...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 행정하는 사람들이 이런 노인들의 '표'를 모를리 없습니다. 당장 서울시만 해도 지난 2012년 서울 종로 일대를 일본 스가모를 모델로 한 '노인의 거리'로 만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변한건 하나도 없습니다. 담당자는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예산상의 문제 때문에..이게 자치구에서 해야 할 부분들이 많아서 현실적으로는 실행에 어려움이 있어요"

노인이 되더라도 경제활동을 하고 나름의 문화를 창조하고 즐기며 세대간 장벽도 허물 수 있다는 희망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선거철에만 흘러 나오는 정치인들의 입발린 고민이어선 안됩니다. 고령사회 진입을 눈 앞에 둔 우리 사회 전체의 고민이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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