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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결혼이 죄는 아니잖아요"…'60년 관습'에 맞선 女직원의 용기

[취재파일] "결혼이 죄는 아니잖아요"…'60년 관습'에 맞선 女직원의 용기
“결혼한 여직원을 59년 동안 퇴사시킨 회사가 있습니다.”

지난 3일이었습니다. 처음 제보를 받았을 땐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뚫어야 할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이 여전하단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결혼이 당장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이유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확인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제보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앳된 목소리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보 내용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여성은 기자에게 10여개의 녹음파일을 보내줬습니다. 결혼을 한다고 알렸던 지난 10월부터 최근까지 몇 달 간 회사생활을 하며 회사 경영진, 직속 팀장과 나눈 일부 대화들이 담겨있었습니다.
대화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여성 직원을 달래기도, 회유하기도, 때론 협박하기도 했는데 주제는 하나였습니다. “우리 회사는 결혼한 여성이 다닌 선례가 없으니 더 이상 다닐 수 없습니다.”
 
● '최초' 타이틀 달았던 '우수 직원'…결혼 소식 알리자 퇴사 종용

여성은 지난 2011년 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유명 사립대 미대를 졸업했지만 취업 문은 좁기만 했고, 그래서 합격 소식은 더 반가웠습니다. 지역 소주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유명 주류업체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꿈을 펼칠 수 있단 생각에 기뻤고 포부도 있었습니다.

입사 순간부터 이 여성은 ‘최초’ 타이틀을 달았습니다. 최초의 4년제 출신 여성 정직원이었고, 지난 해에는 최초의 여성 주임으로 승진도 했습니다. 회사 내에서 공로상도 수상하는 등 업무 능력도 인정받았습니다.
 
회사의 태도가 달라진 건 작년 10월 말쯤이었습니다.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알리자 정확한 결혼날짜가 언제인지를 물으면서 직속팀장을 시작으로 부사장까지 나서 퇴사를 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은 이 때부터 녹취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개인 간의 대화를 상대의 동의 없이 녹음하는 행위를 무조건 옳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녹음을 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결혼을 이유로 퇴사를 종용하면서도 정식 해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분위기 파악해서 알아서 사표 쓰고 나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은밀하게 조여 오는 퇴사 압박을 증거로 남길 방법은 녹음뿐이었다고 여성은 말했습니다.
 
● "결혼하면 근무할 수 없어요. 규정은 없지만 관습에 따라야죠"
방송에도 일부 소개가 됐지만 녹음 파일에 담긴 회사측의 퇴사 종용은 다양하게 이뤄졌습니다. 처음에는 회사의 관습을 따르라고 회유를 했습니다.
 
“어디 규정이나 뭐 이런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없었지만 관습상 그렇게 내려왔을 뿐이고..(이제까지) 결혼하고 난 뒤에 근무를 안 하고 나간 사람들도 다 관습상 그렇게 했을 뿐이고.” “지난 58년 동안 (결혼한 여직원이 회사를 다닌) 전례가 아무 것도 없는데 왜 너가 나서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야.”
 
여성이 퇴사를 거부하자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며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너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얼마나 피해를 보고 있는지는 생각 안하나. 너 주위에 너 때문에 불쌍해지는 사람들은 생각 안하나.”
 
결혼한 여성은 회사 생활에 지장을 주며,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는 내용의 비하적인 발언도 합니다.
 
“여직원이 (결혼하고도) 다님으로 인해 (드는) 인건비는 생각 안 해봤나. 육아휴직이고 나발이고.” “아가씩 때는 결혼해서도 다니고 싶겠지. 그런데 (결혼하면) 오늘 시댁에 제사 있어서 일찍 가야 되고, 연차 써야 되고(그렇게 하겠지). (지금은)여직원들은 토요일 안 나오니 견딜만 하지. 그런데 (남자직원들과) 동일하게 취급한다고 치자. 너희들도 토요일 숙직 서고 다 할래? 아니잖아”
  
● "결혼 이유로 퇴사 종용한 적 없다…인사 발령에 불만 품은 것" 
궁금했습니다. 결혼한 여성이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이유가 뭘까.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회장과 부사장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대신 녹음파일에도 등장하는 관리자 2명, 제보자의 전현직 팀장들을 만났습니다.
 
회사에서는 결혼을 이유로 퇴사를 종용한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녹음파일에 담긴 내용들에 대해서는 ‘사적으로 나눈 대화일 뿐 회사의 입장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사의 인사발령에 불만을 품은 여직원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사발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해 11월, 회사 인사 발령을 통해 이 여성은 홍보팀에서 판촉팀으로 발령이 납니다. 여성은 이 발령이 퇴사 거부에 따른 부당한 전보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무직도 아닌 디자이너를 업무 연관성이 없는 판촉팀으로 보낸 전례가 없다는 겁니다. 회사 측은 회사의 정기 인사에 따른 발령인 만큼 문제가 없고, 디자이너인 여성이 판촉팀으로 간 것은 기존 팀에서의 저성과에 따른 인사 조치라고 말했습니다.
 
여성이 지난 1월 부당 전보 조치 등을 근거로 노동청에 진정을 접수하자 회사는 다시 여성을 디자이너 업무로 복귀시켰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여성은 복귀를 시킨 것 자체가 부당 전보 조치를 인정했다는 뜻이라고 주장하고, 회사 측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복귀를 시켰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현재 대구고용노동청과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 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직권조사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청과 인권위가 같은 사건을 놓고 동시에 움직이는 일은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인권위는 지난 4일 이 회사 회장과 대표이사(부사장)에게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통보했지만, 이 날 회장은 미국으로 출국했고 부사장은 업무를 이유로 조사를 연기했습니다.
 
인권위는 여성에 대한 퇴사 종용과 부당 전보 조치뿐만 아니라 이전에 회사를 퇴사한 여성 직원들 중 같은 피해를 입은 경우는 없는지도 조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여성은 지난 5개월 간 회사와 싸워오면서 우울증 진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때는 가족처럼 지내던 회사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심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고도 말합니다. 노동청과 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하고, 언론사에 제보를 하기까지도 많은 망설였다고 합니다. “꼬리표가 남을 수도 있다”는 남편의 걱정에도 용기를 낸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결혼이 죄는 아니잖아요. 여성이 결혼을 하면 일을 못한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꼭 개선됐으면 좋겠어요. 회사가 법을 지켰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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