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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바이올린 여제'의 즐거운 도전

[취재파일] '바이올린 여제'의 즐거운 도전
‘바이올린의 여제’로 불리는 정경화 씨가 최근 생애 첫 재즈 무대에 도전했습니다. 지난달 25일 밤 강원도에서 열린 ‘평창 겨울음악제’ 개막공연을 위해서였는데,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가 장식한 무대에 특별 게스트로 등장해 재즈 음악 두 곡을 함께 연주했습니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고엽(Autumn Leaves)'과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가 정경화 씨를 생각하며 클래식과 라틴 음악을 접목해 만들었다는 신곡 ’그란디오소(grandioso) 두 곡입니다.

이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저도 평창으로 짧은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본 공연은 밤 9시에 시작했지만, 오후의 리허설 현장을 영상에 담기 위해 일찌감치 평창으로 내려갔습니다. 정경화 씨의 공연을 본 적은 있지만 리허설 취재는 이 날이 처음이어서, 어떤 분위기에서 리허설이 진행될 지 적잖이 궁금했습니다.
오후 3시, 정경화 씨의 무대 리허설이 시작됐습니다. 몸에 달라붙는 타이트한 바지에 민소매 티셔츠, 거기에 흰 색 남방을 걸친 정경화 씨가 등장했습니다. 바이올린에 마이크를 달고 무대에 놓인 낯선 재즈 악기들을 살펴보는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자 정경화 씨의 흥이 폭발했습니다. 협연자들과 눈을 맞추며,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들면서 재즈의 선율을 열정적으로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바케니우스의 기타 소리에 ‘판타스틱(fantastic)'을 연발했고, 나윤선 씨의 노래에는 반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습니다.

활기차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리허설 현장이었습니다. 웃고 떠들며 흥에 겨워하는 정경화 씨는 마치 장기자랑 무대를 앞둔 어린 소녀처럼 한껏 들떠 보였습니다. 일흔을 앞둔 거장 연주자에게서 이런 에너지와 설렘이 느껴지다니 흥미로웠습니다.
분명한 건 그녀가 무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토록 즐거워 보였는지 그 이유는, 리허설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요, 무대에 나가면 스트레스라는 거는 없습니다. 없어요.…옛날에는 기술적으로 아주 완벽하려고 너무 너무 발악을 했습니다. 꼭 올림픽에 나가서 몇 분 몇 초 그걸 마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 노력을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았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스트레스가 있다면 몸이 따라주지 않을까 그건 염려가 되지만 다른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치열한 젊은 시절을 지나온 거장의 여유일까요? 아니면 전공이 아니니 작은 실수가 있다 해도 관객들이 웃어넘길 법한 무대의 특성이 가져다 준 여유일까요? 답은 알 수 없지만, 정경화 씨가 이번 도전에 나선 이유는 분명합니다. 일흔을 앞둔 나이, 손가락 부상으로 인한 긴 공백 기간을 보내고 돌아온 정경화 씨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들려줬습니다.

“내 나이에 지금 한 가지 내 믿음은 ‘앞에 있는 건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무리 실수하고 이게 잘못이라도 우선 하고 봐야죠. 그 경험은 또 다시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지금 이 공연을 하는 건 배짱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배짱이 있어서 하는데, 너무 즐거워요. 감사하고.”

70-80년대 서양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클래식 연주자였고, 9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며 세계무대를 누비던 정경화 씨의 오늘을 보여주는 무대였습니다. 산을 내려오며 더 많은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이는 아마도 산을 올라갈 때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이었던 사람들이겠구나, 새삼 생각했습니다.

“너무 편하고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왜 그러냐면 준비를 많이 해야 자유로워질 수가 있으니까...굉장히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니까 그 자유로움을 관중들도 느낄 겁니다. 어때요, 오늘 좀 자유로워 보였어요?“

‘바이올린의 여제’ 정경화 씨의 재즈 무대는 이제는 무거운 왕관을 벗고 그렇게 자유롭게 맨발로 시원한 바람 속을 걷게 된 노 연주자를 보는 듯 했기에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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