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는 말

단원고 2층과 3층에는 ‘존치교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10개 교실이 있다. 매일같이 아침이면 형광등 불이 켜지고 자율학습이 시작되는 오후가 되면 꺼진다. 활짝 열린 문 안팎으로 편지들이 놓여있고 벽에 붙은 달력은 2014년에 멈춰 있다.

‘2학년’이 적힌 반패(泮牌)에는 ‘명예 3학년’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지난 2014년 4월의 숨소리까지 박제한 것 같은 이 교실들은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들이 수업을 듣던(또는 수업을 했던) 곳이다.
단원고 존치교실 달력
지난 2일 316명의 신입생들이 단원고에 입학했다. 교실 8곳이 부족했던 단원고는 교장실, 교무실, 음악실, 과학실 등을 개조해 교실로 만들었다. 새 단원고 교장실은 학교 밖에 다섯 평 남짓한 규모로 가설한 컨테이너 박스다.

재학생 학부모들로 구성된 학교운영위원회는 자녀들이 제대로 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문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도 했다. 교문을 막아서라도 존치교실을 원래 교실로 돌려놓겠다고 했다.

존치교실을 둘러싼 세 번째 협의가 5시간 만에 끝났다. ‘명예’ 졸업생들의 부모와 재학생들의 부모들이 모여앉아 교실 칠판과 책상마다 빼곡하게 적혀 있었던 ‘4월 16일’이라는 날짜를 어렵게 새로 찾았다. 다음 달 세월호 2주기가 끝나는 대로 10곳의 존치교실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옮기기로 했다는 합의문을 냈다. 경기도교육청이 2019년까지 짓겠다며 가안으로 제시한 4.16 민주시민교육원이 세워지면 그때 다시 옮기기로 했다.

“우리 아이들이 자유롭게, 그 교실들을 보고 먹먹함 느끼지 않고 
꿈을 키워주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재학생 학부모)
“…….” (세월호 유가족)

만장일치 동의로 ‘합의 제안서’를 쓰고 회의실을 나설 때 양쪽 부모 모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신형철, 『문학동네』 2010년 가을)

존치교실 바로 옆에 수업을 듣는 재학생 학급도 있다. 환한 꽃들과 색종이 편지들로 가득한 오른편 교실과 반쯤 불을 켜 어두컴컴하지만 아이들로 왁자지껄한 왼편 교실의 생동감은 비할 바가 못 됐다.

재학생 가족들은 죄 없고 순수한 자식들이 그들의 천진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너무 많이 애도할까봐’ 미안해했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천진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그들의 자식들을 누구도 애도하지 않을까봐 미안해했다. 이 엇갈린 미안함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찾은 결론은 바로 4월 16일이었다.

회의장을 나서며 눈물이 맺힌 양쪽 가족들에게 어쩌면 일말의 위로가 될지 모르는 한 문장을 전달하고 싶다.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을 쓴 젊은 문학평론가의 말을 조금 더 들어봐야 한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죽었을 때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약 그 슬픔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병이다'라고. 그러나 또 어떤 학자는 말합니다. '살아있는 자가 상실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복귀하는 순간 죽은 자는 한 번 더 죽는다. 그러므로 끝나지 않는 슬픔은 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적인 것이다'라고.”

애도에 관한 이 상반된 정의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삶을 찾은 이에게도,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묘한 위로를 준다. 떠난 이를 가슴에 묻고 슬픔을 털어냈을 때 비로소 ‘애도가 완성됐다’고 할 수도 있고, 떠난 이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슬퍼할 때 ‘애도의 윤리가 지켜졌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반된 정의가 부딪치는 한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애도의 몫, 애도의 정의

그렇다고 단원고 동문과 그들의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를 담은 이 한 문장만은 아니다. 각자에게 적합한 몫을 분배하는 것을 ‘정의’라 한다면, 상반된 뜻의 ‘애도’를 겪는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애도의 정의’다.

먼저 존치교실이 사라질 때(이전될 때) 희생자 가족들이 느낄 두려움과 상실감은 왜 발생한 것인지, 다시 말해 2년이 가까운 시간이 가도록 그들은 왜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우리 사회는 단원고 학생과 가족들에게만 ‘너무 많이’ 애도할 것을 강요해 왔는지 반성하는 것이 바로 '애도의 정의'를 지키는 시작일 것이다.

2010년 쓴 문학평론가의 글 말미에는 이런 말도 있다.

“소설을 애도작업의 일환으로 볼 때 (중략) 두 가지 정도의 질문을 더 질기게 물어야만 애도의 서사가 애도의 윤리학에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애도작업은 주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둘째, 그 주체를 위해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5시간에 걸쳐 완성된 ‘단원고 존치교실 관련 협의회 제안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큰 꼭지로 구성되었다. 1.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2. 교육을 바꾸겠습니다 3. 진실 규명을 위하여 가족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이 합의문은 ‘단원고 동문 가족들’끼리의 합의문이 아닐 것이다. 슬퍼하고 미안해하는 이들을 위해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저술에서 발췌한 인용구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애도’를 분석한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