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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억 원을 준다면 한 쪽 눈으로만 사시겠어요?"

골프장 캐디로 일하다 날아오는 골프 공에 왼쪽 눈을 맞아 시력을 잃은 25살 청년이 있습니다. 골프공을 친 고객은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을 통해 9천800만 원을 보상금으로 지급 했습니다. ‘보상금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저도 그런 질문을 건넸습니다. 청년은 답 대신 저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누군가 1억 원을 준다면 한 쪽 눈으로만 사시겠어요?” 
● 골프선수 꿈꾸며 캐디로 일하던 20대 청년

청년은 2012년부터 한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했습니다. 일하는 목적은 단 하나. 골프선수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골프선수를 꿈꾸기엔 적지 않은 나이. 유명한 프로선수가 되진 못하더라도 세미프로로 데뷔해 골프강사로 살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캐디로 일하며 벌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300만 원 정도. 그 돈이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아도 프로선수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골프장 기숙사에 살며 일을 하고, 일이 없는 날은 레슨을 받았습니다.
 
꿈이 무너진 건 1년 전.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공을 줍기 위해 고객과 함께 공이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는데 다음 순서 고객이 친 공이 하필 청년이 서있던 자리로 날아온 겁니다.

왼쪽 눈을 정통으로 맞았고 그대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이후 1년 간 수술과 치료를 반복해왔습니다. 치료비만 2천만 원 넘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의 왼쪽 눈은 코앞에 있는 물체도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안압도 정상치의 3~4배에 달합니다. 시력을 잃는 것은 누구에게나 절망적인 일이지만 골프선수 지망생에겐 꿈을 포기해야하는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병원 치료 외엔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 골프장 "법적 보상 책임 없다" 이유는?

작년 말이 돼서야 보상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공을 친 고객과 서로의 과실 여부를 놓고 싸우다 7대3의 결과를 얻어냈고, 고객이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사에서 9천800만원을 지급했습니다. 골프장으로부터도 사과와 보상을 받고자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골프장은 법적으로 청년에게 보상을 할 책임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궁금했습니다. 분명 골프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는데 왜 사업주는 책임이 없을까. 취재진은 골프장을 찾아가 담당자들을 만났습니다. 주장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캐디는 근로자가 아닌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다.
둘째. 청년은 고객이 공을 칠 때 앞으로 나가면 안 되는 안전수칙을 어겼다.
셋째. 청년이 동의한 산재적용 제외 신청에 따라 사업장에는 보상 의무가 없다.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캐디는 근로자가 아니라는 주장, 맞습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서 규정하는 ‘근로자’에 캐디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캐디는 보험설계사, 학습지교사 등과 더불어 특수고용직입니다.

근로자가 아니라는 것은 법이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업주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법에 따르면 “캐디가 다쳤을 때 직원 차로 병원까지 데려가고 치료비도 부담했다”는 골프장의 행동은 의무가 아니라 배려가 됩니다.
 
안전 수칙을 어겼다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고객의 공을 줍기 위해 간 것이지만 공보다 앞으로 나가는 것은 캐디는 물론 골프장을 이용하는 고객들도 꼭 지켜야 하는 안전수칙이라고 합니다. 본인의 안전수칙을 어겼다가 공을 맞았으니 본인의 과실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 제외, 이 부분도 맞습니다. 청년은 지난 해 이 골프장에 입사하면서 산업재해보험 제외 적용 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캐디를 포함한 특수고용직도 산재보험 대상이지만 본인이 적용을 원하지 않으면 가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에 ‘적용 제외’ 신청서를 제출하면 됩니다.
청년은 스스로 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골프장은 이 신청서를 근거로 보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 신청서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듣지도 못했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도 몰랐고, 할 수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골프장 측에 산업재해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사실을 청년에게 알려줬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골프장이 관례적으로 다 이렇게 합니다.”
 
● 산재보험 가입 선택권 없는 특수고용직…"일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특수고용직을 보호하겠다며 만들어 놓은 법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입니다. 이 법에 따르면 특수고용직도 산업재해보험 적용 대상이 됩니다. 단 본인이 신청을 해야 하고 보험금 일부를 직접 부담해야 합니다.
 
그런데 125조2항에 특이한 항목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그 적용을 제외신청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입니다. 제외신청을 할 경우는 그 사업의 근로자로 보지 않는다고 돼있습니다.

언뜻 보면 특수고용직에게 선택권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이 캐디 청년의 경우처럼 산재보험 가입을 막는 독소조항으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사업주들은 특수고용직 본인들도 산재보험 가입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보험금의 일부를 본인이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이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캐디들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산재보험 적용을 신청해도 일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면 신청을 고민해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적지 않은 캐디들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개인 보험을 가입해 놓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겁니다.
 
취재 과정에서 골프장 측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캐디는 우리가 고용한 근로자가 아닙니다. 오늘 일하다 내일 관두면 그만인 자유직업이에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이 참 매몰차고 아프게 들렸습니다.
 
오늘도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불안한 노동을 하루하루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근로자와 노동의 강도와 형태는 다를 것이 없음에도 법의 보호에선 예외인 이들, 법의 빈틈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는데 특수고용 노동자의 규모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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