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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 대사] 영화 '캐롤'…"절대 부정하지 않을 거예요."

[이 영화, 이 대사] 영화 '캐롤'…"절대 부정하지 않을 거예요."
이명세 감독의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한두 번쯤 “종소리가 들리는” 순간이 있다. 물론, 그 순간이 꼭 귓가를 때리는 소리로만 오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은 때로 예고 없이 쿵 떨어진 심장이 발등을 때리는 통증의 순간으로 온다. 무심히 돌아본 시선에 방금 지나쳐간 이의 뒷모습이 박히는 호기심의 순간으로 오기도 한다. 이유 없이 눈을 마주치기 어려운 두려움의 순간으로 올 때도 있다.
 
‘캐롤’은 바로 그 ‘순간’에 대한 영화다. “사랑, 그 찰나의 이끌림”이라는 예고편 속 카피가 이를 증명한다. 대중성과 거리가 먼 성 소수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도 영화는 꽤 순항 중이다. 영화를 가득 채운 ‘통증’과 ‘호기심’의 순간들이 사랑을 기억하고 갈망하는 관객들을 두루 유혹하는 덕분이다.
 
그러나 영화관 문을 나선 뒤에도 오래 동안 관객들의 마음을 붙잡는 ‘캐롤’의 매력은 따로 있다. 바로, 넘쳐나는 ‘통증’, ‘호기심’과 달리 ‘두려움’의 순간은 영화 속에서 지극히 짧다는 사실이다. ‘캐롤’은 그 ‘두려움의 순간’을 극복하는 힘에 관한 영화기 때문이다. 그 힘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진부하고, 상투적이고, 꽤 자주 통속적이고, 너무 많이 팔리고 또 팔려서 이젠 서푼어치 가치도 없어 보이는 단어,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를 놓고 사람들은 자주 손발이 오그라들게 하는 유치한 감정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을 지배하는 본질이 ‘힘’이라는 사실을 잊고 하는 말들이다.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모든 관계는 그 안에서 하이어라키를 낳는다. 당연히, 사랑도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 내재된 하이어라키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한눈에 봐도 강자는 캐롤이고 테레즈는 약자다. 캐롤은 테레즈에 비해 나이도 많고, 사회경제적 계급도 상위에 있다.

무엇보다, 처음 ‘특별한 사랑’을 만난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만큼 여유 있고 느긋하다. 감정에 끌려 다니기에 급급한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꽤 능숙하게 상황을 주도해 나간다.
‘사랑’이라는 명사는 동사로 바뀌는 순간 둘로 나뉜다. 하나는 ‘사랑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받다’다. 사랑받는 이의 얼굴은 포만감과 평온으로 빛난다. 반면 사랑하는 이의 가슴은 늘 허기지고 두렵다.
 
노련한 캐롤과 달리, 갑작스런 사랑에 압도당한 테레즈는 사랑 받는 기쁨을 즐길 여유가 적어 보인다. 사랑을 하는 것 만으로도 바쁘다. 영화 내내 캐롤 앞에서 테레즈가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영화는 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이는 테레즈가 아니라 캐롤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예상치 못한 반전은 관객들에게 예상을 뛰어 넘는 감동을 안긴다. 그리고, 캐롤이 마침내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순간 관객들은 사랑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순간,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 자리는 각자의 내부에 있다. 그래서 제자리를 찾아 가는 길은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때로는 많은 걸 포기하면서라도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캐롤'을 놓고 어떤 이들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인간과 인간의 보편적 사랑을 그린 영화라고 말한다. 어느 편이든 상관 없다. 영화 '캐롤'이 주는 감동의 본질이 주인공들의 성별에 있지 않은 탓이다.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는 건 사랑 앞에 당당한 이들의 태도다.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이들의 확신이다. 영화 속에서 캐롤이 말한다. “내가 원했던 일이에요.” “절대 부정하지 않을 거예요.”

추억으로 새겨졌든 악연으로 남았든, '종소리'가 들렸던 순간을 기억해 보자. 그 순간이 '지나간 사랑' 또는 '실패한 사랑'으로 끝나 버린 건 꼭 상대방의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내 사랑 앞에서 나는 얼마나 당당했었는지. 나는 얼마나 내 사랑을 확신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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