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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이집트의 조삼모사 외환정책

달러나 유로 같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외국화폐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는 그 나라 국가경제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가지고 있는 외화가 적으면 그 만큼 외부의 영향에 나라 경제가 쉽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 물건을 사고 파는데 파는 쪽에선 사는 쪽의 금고가 텅 비었으면 돈을 받기 힘들수 있으니 쉽게 물건을 내주기 어렵겠죠? 그리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도 그 집안에 곳간이 비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앞다퉈 달려가 내 돈 먼저 내놓으라며 닦달을 할 수 있습니다.

집에 돈이 없다는 소문이 돌면 또 누구도 그 집과 거래를 트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럼 그 집은 별수 없이 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금고(은행)에 돈(외화)을 쌓아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급한 일이 터져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다른 나라들에게도 돈 때일 걱정 없는 나라라는 믿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럼 금고에 외화를 쌓으려면 어떻게 할까요? “벌면 되죠”라고 우리 같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수출 지향국가들은 생각합니다. 그럼 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나라는 어떨까요? “안 사면 되죠”가 정답일까요? 수입이 줄면 보유 외환은 늘지 몰라도 나라 안에 이런저런 제품이나 생필품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국민들은 어떻게 뭘 먹고 살아야 할까요?

이런 딜레마에 빠진 나라가 바로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집트입니다. 오늘은 무역수지 적자국 이집트의 외환 지키기 정책이 낳은 문제를 다뤄볼까 합니다.

● 이도 저도 바닥난 곳간

상식적으로 수입이 수출보다 많으면 그 나라는 돈이 바닥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집트도 그런 무역수지 적자국입니다. 매년 280억~350억달러의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합니다.

그런 이집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크게 3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관광수입과 수에즈운하 통행수입, 그리고 해외근로자의 송금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경상수지 적자폭을 줄이고, 여기에 영원한 후원자 걸프왕정의 오일달러 원조로 근근이 나라살림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외화벌이의 효자들이 영 탐탁치 않습니다. 시민혁명과 군부 쿠데타에 이은 이슬람 무장단체 IS의 준동으로 관광산업이 뒷걸음질 치더니, 지난해 10월 시나이 반도에서의 러시아 여객기 폭파테러로(이집트 당국은 아직도 테러라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관광객이 뚝 끊겼습니다.

겨울철 홍해 주변 리조트는 러시아와 유럽 관광객으로 극성수기를 누렸는데 요즘은 홍해에 가면 대접받는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유럽 관광객이 줄었습니다. 이집트의 관광수입은 시민혁명 이전 2010년 125억 달러에서 지난해 61억 달러로 반토막이 났습니다.
폭파된 러시아 여객기
수에즈 운하는 어떨까요? 지난해 8월 이집트는 야심차게 제2 수에즈 운하를 개통했습니다. 양방향 운행으로 통과시간이 7시간 단축되고 물동량도 2배로 늘어서 통행수입이 연간 53억달러에서 두 배는 늘어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국제경기 특히 유럽경기 침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국제무역의 물동량이 줄면서 지난해 9월 통행수입은 전년 대비 4분의 1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수에즈 운하 통행료 수입은 전년과 비슷한 53억달러 수준이지만, 제2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만 따지면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해외 근로자들의 본국 송금도 마찬가집니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주로 중동과 아프리카의 건설현장에서 일합니다. 리비아도 그 중 한 곳이었는데 지난해 IS가 리비아 지중해 해안에서 이집트의 콥트교도를 집단 참수한 이후 리비아에서 있던 이집트 노동자들을 모두 본국으로 송환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주요 근로현장이었지만 국제유가 하락으로 사우디 역시 건설 현장 곳곳이 중단됐습니다. 이러면서 해외에 나가 있는 이집트 근로자들의 본국 송금도 줄고 있습니다. 걸프 왕정의 원조는 국제유가가 반의 반 토막 난 상황에서 두말 할 필요도 없죠? 자기 살림살이도 팍팍해진 마당에 이웃집 끼니 걱정할 처지가 아닙니다.

● 위태로운 외환보유고

이집트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는 지난해 164억 달러로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걸프 3개국이 지원한 120억달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매년 350억달러의 무역적자가 생기니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디폴트가 찾아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위기 타계의 전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수입이 많아 생기는 문제이니 수입을 줄이자”는 것 입니다. 그 첫 번째 정책이 외화 블랙마켓(암시장)을 잡겠다는 명목으로 시행한 ‘한달 5만 달러 이상 해외송금 금지’ 입니다.

이집트 은행에는 달러가 주복합니다. 그래서 수입업자들은 암시장에서 달러로 바꾼 뒤 물건 값을 수출업자에 송금해왔습니다. 송금규제로 물건 값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면 수입을 줄일 것이고, 그러면 암시장에서 달러를 바꾸는 일이 줄고, 암시장에 달러가 유통될 이유가 사라져 시중 은행으로 달러가 모일 것이고, 자연히 외환보유고는 늘 것이라는 발상이죠.

그것도 부족한 지 수입 규제를 위한 정책도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수입 예치보증금이라고 해야 하나요? 수입업자가 수입품의 통관을 위해 이전에는 물품대금의 50%를 은행에 예치해야 했는데 이것을 100%로 올려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전에 1000원 어치 물건을 500원 만 맡기고 들여온 뒤 그걸 팔아서 번 돈으로 남은 대금을 지불하면 됐는데, 이제는 온전히 1000원이 다 있어야 된다는 거죠. 결국 수입업자로서는 같은 돈가지고 들여올 수 있는 물품의 양이 절반으로 줄게 된 셈입니다.
또 하나가 관세 인상입니다. 가전제품. 화장품. 의류. 신발. 견과류 등 5백~6백개 수입 품목에 대한 관세를 현재 10~30%에서 20%~40%로 올렸습니다. 수입품 가격을 올리겠다는 거죠. 그럼 수입품 구매가 힘들어질 테니 수입이 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수입이 계속되면 관세수입이 늘어날 것입니다.

여기에 수입대금을 송금할 때에도 모든 선적서류를 반드시 수출업자 나라의 은행을 통해 수입자가 거래하는 이집트 은행에 제출되도록 했습니다. 돈을 보내는 것조차도 까다롭게 만든 거죠.

일단 극약처방의 효과는 있어 보입니다. 지난해 이집트의 수입 규모는 530억 달러로 전년도 640억 달러에 비해 15% 이상 줄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외환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꽁꽁 싸매면 국민의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을까요?

● 대안 없는 단기처방

이집트는 앞서 적은 대로 수입 의존국입니다. 나라에서 쓰는 물건들이 자국 생산품보다 수입품이 더 많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수입이 줄어 물건이 귀해지면 물가가 오르게 되고, 물가 상승의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가 떠안게 됩니다.

이집트 정부도 지금의 수입제한 정책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집트 중앙은행장도 관세 인상이 85만 수입업체에 타격을 주고 소비시장에서 불합리한 가격 상승을 야기시킬 것이라고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일은 정부가 저지르고 부담은 국민이 떠안는 격입니다. 그래도 나라가 살아야 국민도 사니 어쩔 수 없다는 게 이집트 정부의 논리입니다.

수입 제한 정책은 이집트 스스로는 자국 산업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디폴트가 닥칠 지모를 상황에서 내던진 벼랑 끝 전술과 다름없습니다. 이집트 내부에서 조차 수입 제한 정책이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임시방편책일 뿐이라는 비판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수입 제한 정책은 어차피 바닥이 보이는 정책입니다. 몇 년간 이어진다면 이집트는 오히려 극심한 인플레이션이란 역풍을 얻어맞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허리띠를 졸라매 모은 외환으로 수출을 늘리기 위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산업 발전도 될 수 있고, 그 많다는 가스 유전 발굴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런데 투자할 돈은 없습니다. 외환보유고는 줄면 줄었지 늘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돈이 어디로 새는 걸까요?

중동은 왕정 아니면 독재국가가 대부분입니다. 독재자는 왕처럼 국민의 환심을 사고 존경 받길 원합니다. 그러면서 국민의 불만이 표출되기 않도록 하기 위해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억압하면서 정권을 유지합니다.

이집트도 그렇습니다. 나세르와 사다트, 무바라크에서 엘시시로 이어지는 권력자들은 한결같이 민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는데 통치력을 집중해왔습니다. 그래서, 주식인 빵을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나눠주고, 전기나 기름에는 정부가 상당부분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빵을 만드는 밀과 전기를 만들고 자동차를 굴리는 기름은 거의 수입해야 합니다. 걸프 왕정이 지원한 120억 달러의 상당부분도 이런 식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란 추측입니다. 아무리 외환을 아끼고 모아도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식으로는 이집트는 외화부족에서 탈출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국민의 태도도 문제입니다. 국민의 절반이 하루 2달러도 벌지 못하는 극빈층이라 과감한 정부보조금 철폐를 감내할 능력이 없습니다. 전기 보조금 철폐로 내전이 일어난 예멘처럼 정부보조금을 없애고 국내 산업을 키우겠다고 발표하면 국민들이 들고 일어날 지 모릅니다.

물론 이집트에도 잘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자들의 생활수준은 우리나라를 능가합니다. 그렇지만 극소수의 부자는 대다수의 빈민을 외면합니다. 나만 잘 살면 오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오랜 혼란의 현대사를 통해 자리잡은 듯 합니다.

그들에게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시절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모으기를 펼치기도 했다고 말하면 놀랍니다. 애국심에 놀라면서도 왜 그러면서까지 나라를 살려야 하느냐고 한편으론 의아해 합니다.
● 3중고에 시달리는 한국 기업

카이로 교민 가운데 무역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은 요즘 일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합니다. 대금을 이집트 파운드를 받아도 달러로 송금을 하지 못해 애를 먹는데다 관세며 선적절차며 여러 가지로 귀찮고 힘들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전기관련 사업을 하는 한 교민은 각종 서류 제출로 겪는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물품을 선적하면 통관을 위해 관련 서류를 이집트 은행에 제출하고 대금은 전신환 송금을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통관을 위해 한국의 은행에서 선적 서류를 이집트 은행에 보내줘야 하도록 됐습니다.

신용장의 경우 한국의 은행이 2% 정도의 수수료를 챙기니 선뜻 해주지만 수수료가 발생하지 않는 전신환 송금까지도 국내 은행이 보증 업무를 해줄리 만무합니다. 국내 은행에 이집트의 사정을 이해시키기가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결국 은행 대 은행간 서류 제출이 늦어지고 어려워지면서 수출할 물건을 선적하는 것도 늦어지고,  이집트에 도착한 물품을 찾는 것 역시 늦어지면서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전자제품업체들은 관세 인상으로 가격 경쟁력 하락을 우려하기 합니다. 이번 달부터 수입되는 가전제품의 경우 관세가 10%에서 최대 25%까지 인상됐습니다. 자연히 소비자 가격도 그만큼 오르게 되겠죠.

이집트 현지에 생산공장을 마련한 샤프나 도시바 같은 경쟁업체의 제품은 관세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집트는 EU와 자유무역협정 FTA를 맺었습니다. 유럽에서 생산된 제품은 FTA에 따라 무관세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지 생산 제품과 EU 제품에 비해 관세가 더 얹혀진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은 뒤처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물품 대금을 달러로 송금하는 것도 어렵고, 수출한 제품의 통관도 복잡해지고, 관세로 가격마져 오르면서 이집트와 거래하는 한국 기업은 3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수출이 까다로와지고 돈도 받기 힘들어지면서 대 이집트 교역량은 눈에 띄게 줄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이집트 수출량은 2013년 15억 달러에서 2014년 23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가 지난해 다시 21억 달러로 줄었습니다.

문제는 이집트의 외환 보유고 증대를 위한 수입제한 정책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외환보유고가 늘어야 다른 방도를 모색할 텐데 그 정도로까지 외환은 모아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정책시행을 그만 두자니 줄줄 새는 외화를 지켜낼 재간이 없습니다. 이집트의 딜레마입니다. 그 딜레마에 시달리는 한국 기업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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