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합 땐 반바지를 입어선 안된다
-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된다
- 학교에서 슬리퍼를 신어서는 안된다
- 이어폰을 꽂고 걸어다니면 안된다
- 과 트레이닝복의 깃을 세우면 안된다
- 종결어미 '다' 나 '까'만 써서 이야기해야 한다
군대 규정 같아 보이지만, 한 대학 경찰행정학과 학생회 내부 규율의 일부입니다. 이 대학 신입생들은 입학 즉시 이 규율을 따라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선배들로부터 폭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학과 학생회엔 '규율부'라는 조직도 있었습니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강원도의 한 대학에서 최근까지 벌어졌던 일입니다. (관련보도: 1월 26일 <SBS 8 뉴스> ▶ "폭언도 전통" 황당한 미화에 병드는 대학교 )
신입생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건 강제 집합이었습니다. 집합은 매주 목요일에 이뤄졌다고 합니다. 학교가 지방에 있다보니 금요일엔 타지(他地)의 집에 가는 신입생들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집합에선 주로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까요. SBS가 확보한 녹취의 일부분입니다. 방송에 담지 않은 내용도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야, 미친거 아니냐 XX XXX들아, 왠만하면 욕 안하는데...야, 하기 싫으면 과탈해도 돼. XX 과 생활 하기 싫은 사람 나가. 과 생활 하기 싫으면 나가면 돼. 다들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아파가지고 나온 애들도 있는데 뭔 X팔린 짓이야. XX같은 XX들 욕 안하려고 하는데, 내가 아무 말 안하니까 만만해보이지 니네? 불만있는 XX 일어나봐, 너희가 숫자가 더 많아. 나 때도 그랬어 뒤에서 많이 XX어. 어리다고 오냐 오냐해주니까 풀어져가지고, XX XX 것도 아니고. 니네 3학년이야? 4학년이야? 예비역이야?
=아닙니다.
-과칙 지키기 싫으면 니네 나가, 과 생활 하지마. 과 생활 안하면 이점 알려줄까? 나한테 인사 안해도 돼, '다'나 '까' 안써도 돼. XXX들 치마 입고다녀. 대신 나 포함해서 우리과에 피해 입히지 그럼 그 XX 후배로 안봐 XXXX들아.
-니네 수업태도 X판이야. 슬리퍼 신으면 돼 안돼. 신은 XX들 뭐야. 과트레이닝복 목까지 올리지 마 알았어? 니네 수업시간 XX XX인데, XX애들 누가 수업시간 사진찍어서 SNS에 올리래. XXX들 대답 안해? 걸려, 내가 수업 들어갈테니까 걸려.
-야, 야 뭐하는거야. 선배가 앞에서 얘기하잖아. XXX야. 야! 안나와? XXXX 장난쳐? 야! 대답 크게 해!
=네, 알겠습니다!
체육대회가 한창이던 지난해 5월, 일부 신입생이 응원에 불참했다고 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어김없이 신입생들은 선배들로부터 집합을 당했고 욕설과 폭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 학생은 식당에서 얼굴을 모르는 과 선배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격 모독을 당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학부제로 신입생을 뽑다 보니 이 과 신입생들의 숫자는 200명이 넘습니다. 선배들은 이렇게 많은 학생들을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활용했습니다.
우선 신입생들을 여러 조로 나누고 조장을 뽑습니다. 그리곤 조장들과 대화하는 카톡방을 만들었습니다. 선배들이 이 방에 지시 사항을 남기면, 조장은 선배의 지시를 자신의 조원들이 있는 방에 퍼나르는 방식입니다. 선배들의 지시가 일사불란하게 전달되는 시스템입니다.
"강제집합을 왜 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한 학생회 소속 학생은 "학과의 여러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이토록 효율적으로 카카오톡을 활용하면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신입생들을 집합시켰다니요. 설득력이 떨어지는 해명입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이른바 '과탈'입니다. 과탈퇴를 줄인 말인데, 사실상 왕따를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해병대로 치면 기수열외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 학생들이 선배들로부터 받은 문자입니다. 어떤 분위기인지 쉽게 이해가 가실겁니다.
과탈한 애들이랑 선후배 사이하지 말고 페북 타임라인에서도 서로 친한척 하지마! -선배님 전달사항-
후배들에게 '과탈'은 협박과 다름 없었습니다. "규율을 따르는 게 싫고, 집합이 싫으면 과탈해"라는 말 뒤엔 "근데 과탈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란 이야기가 따라붙었습니다. 신입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쉽게 짐작이 됩니다.
일부 학교 관계자들과 학생회 학생들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원래 안 그러는데 딱 몇번 화를 낸 것이 문제가 됐다" "예전엔 더 심했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 "전통이었다" "다른 학교 유사한 학과에서도 다 그렇지 않은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BS가 확보한 녹취엔 학생회 간부가 신입생들에게 "내가 너네 때렸냐?"고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때리지는 않았으니 폭력을 행사한 건 아니지 않느냐는 취지로 들립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 법원은 일관되게 폭언과 욕설, 조직적인 왕따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폭력은 사람의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으로 피해를 주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는 게 기본적인 법 해석입니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되겠다는 학생들과, 그런 학생들을 경찰로 키우겠다는 교수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결 어미 '다' 나 '까'를 쓰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합니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준공무원 신분인 경찰대 학생들조차 '다' 나 '까'를 규율로 규정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P.S. 보도가 있기까지 많은 신입생들이 용기를 내 줬습니다. 당사자의 요청으로 보도되지는 못했지만 폭언 이상의 피해를 입은 학생도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최근 이 학과 학생회는 강제 집합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행사된 폭력이 사라지는데, 이번 SBS의 보도가 작은 밀알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