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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독한 미식가들에게

[칼럼] 고독한 미식가들에게
혼자 밥 먹는 일은 쓸쓸한 일이다.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약속이 없거나 갑자기 취소되는 경우 혼자 점심을 먹는다. 그럴 때는 대개 지하 구내식당을 이용하는데 붐비는 시간을 피해서 오후 한 시쯤 느지막이 간다. 혼자 밥 먹으로 내려갈 때마다 여유있게 천~천~히 먹자고 다짐한다.

그런데 이 다짐은 다짐으로 끝나기 일쑤다. 혼자 밥 먹는 시간은 아무리 천천히 먹어도 10분을 넘기기 어렵다.천천히 먹자고 자기 암시를 거는 순간에도 뭐에 쫓기듯 후루룩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입에 남은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식판을 들고 일어서기도 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쓴웃음이 절로 난다. 이러니 구내식당에 내려갔다가 혼자 식사 중인 동료를 만나면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혼밥'으로 맺어진 동병상련의 유대감 때문일까, 그런 동료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된다. 한 때는 혼자 밥을 먹어야 될 상황이면 아예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혼자 밥 먹는 모습을 아는 이에게 들키는(?) 것은 절대 피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혼자 밥 먹는 것을 무리에서 배제되거나 관계에서 소외된 증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혼밥은 단순한 쓸쓸함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10년 전 도쿄에서 연수할 때는 혼자 밥 먹는 게 일상이었다. 아는 이들이 많지 않으니 식사 약속이 적었고 혼자 먹는 밥은 당연한 일이었다.

점심은 학교 구내 식당에서 저녁은 집주변 식당에서 주로 해결했다. 동반자가 있을 때도 있었지만 없을 때가 많았다. 처음엔 혼밥이 영 익숙치 않았다. 혼자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넣은 스파게티에 체해서 심하게 고생한 적도 있지만 나중에는 혼자 밥 먹는 게 오히려 편했다.

서울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게 내겐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 부근 라면 가게에서 생맥주 한 잔 시켜놓고 느긋하게 먹는 맛이 그럴듯했다. 잘 구워진 군만두의 바삭한 식감이며 노릇한 만두의 색감, 면발의 탱탱함, 거기에 맥주 특유의 목넘김까지.

이런 거 하나하나를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 느끼며 먹는 것에 집중했다. 혼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에 쫓기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사람에 쫓기지 않는 연수 생활의 여유가 온 몸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다시 혼자 밥 먹는 일이 불편하고 쉽지 않은 일이 됐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일본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먹는 일에만 집중하면 됐다. 나 말고도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아니 혼자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서울이라고 누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리 없건만 지금도 혼자 식당에 들어설라치면 아는 얼굴 없는지부터 확인한다. 이 무슨 고약한 버릇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혼밥이 대세라고 한다. 특히 젊은층 가운데 혼자 밥 먹는 이가 늘고 있고 이런 사람들을 겨냥한 식당들의 마케팅도 활발하다고 한다. 혼밥은 개인화에 따른 자연스런 추세일 테니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취업란 등으로 주머니 사정이 빡빡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밥 한 끼 같이 할 경제적 여유는 물론 타인과 무엇을 같이한다는 정신적인 여유가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일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고 취업을 하더라도 열에 네 명 이상이 비정규직이니 같이 하는 밥자리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도 있겠다. 밥 먹을 때나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혼자 하는 일이 어찌 밥 먹는 일뿐일까? 퇴근길 샐러리맨이 혼자 생맥주 한 잔 시켜 놓고 술 마시던 10년 전 도쿄의 풍경이 우리에게도 곧 익숙한 풍경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을 '혼술'이라고 한다던가?

'혼술' '혼밥'에 혼자 놀이공원 가는 '혼놀'에 혼자 클럽에 간다는 '혼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그런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많기야 하겠는가 싶었는데 후배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사람이 많단다. 

서점 신간 코너에 가면 <혼자 있는 시간의 힘>, <고독이 필요한 시간>,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등등 혼자 있기를 권하는 책들이 앞자리에 진열돼 있다.
 
요즘 유행하는 혼밥은 자발적인 성격이 강해보인다. 같이 할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혼밥도 있겠지만,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혼밥이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런 혼밥이라면 적극 권할 일까지는 아니겠으되 걱정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뜯어보면 요즘 혼밥 현상이 관계맺음의 포기, 나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기대의 포기가 아닐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지난 1987년 이후 젊은 세대들이 광장에 모여 무언가를 요구한 것은 성공보다는 좌절, 패배로 끝난 일이 훨씬 많다. 그런 실패 또는 성취 없음의 집단적 기억이 함께 모여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 먹는 일이다-자체가 무모하거나  덧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라면, 또 우리 사회는 뭘 아무리 요구해도 되는 것이 없어라고 판단해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 혼밥 문화라는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 사회를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이른바 '헬조선'이니 뭐니 하는 말과 혼밥이 한묶음으로  연상되는 것이다. 혹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내가 금수저 은수저 물고 태어난 저들과, 반대로 금수저인 내가 흙수저인 저들과 밥을 함께 먹느니 차라리 혼자 먹겠다는 생각이 혼밥 유행의 또 다른 배경이라면 우리 사회는 병들어도 심하게 병들어 있는 것이다. 설마 그러기야 할까만은..

요즘 일본 만화 <고독한 미식가>가 인기다. 이 드라마 봤다는 사람들이 주위에도 적지 않다. 주인공이 식당에 들러 음식 먹는 게 내용의 전부다. 형식도 무슨 모노드라마 같다. 이런 단순한 형식과 내용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보면 밥 먹는 일은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중요한 일인 모양이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에게 밥먹는 것은 한 끼를 때우는 일도 아니고 업무의 연장도 아니다. 즐거움 그 자체다.

나오는 식당과 음식들이 이른바 맛집이나 고급 요리도 아닌 골목길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란 굳이 동반자의 격한 공감이나 감탄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혼자일 때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만화책과 드라마의 인기에 불편함을 느낄 이유는 없다.

우리의 혼밥 열풍도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권하는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것 말고.   

(사진=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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