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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구성의 오류'와 '체포 후 48시간'의 딜레마

경제학에 젬병이지만 학창시절 기억을 더듬어보면 ‘구성의 오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개별적으로 합리적이고 타당한 일이지만 개별 행동들이 모였을때 전체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된다는 뜻입니다. 가령, 경기장에서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경기 잘 관람하기”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타당한 행동이지만 모두 같은 생각으로 일어나면 경기를 관람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이야기가 흔히 뜻풀이를 위한 예화로 제시됩니다.

구성의 오류는 ‘개별요인들이 좋으면 결과도 좋다’는 인과율을 철저히 배반한 용어기도 합니다. 원인이 결과로 가는 도정에는 매우 많은 우연과 돌발변수들이 자리하기 마련입니다. 구성의 오류야말로 우리 삶에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성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언제나 똑 떨어지는 결말만을 추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여중생 A양의 이야기를 들은 건 몇주 전이었습니다. 몇 개의 키워드로도 간단치 않은 사건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원조 교제, 보복 폭행, 구타, 성폭행 같은 단어가 오르내렸습니다. 자세히 들은 전말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폭행 장면을 목격한 여중생들이 가해자들의 신원을 피해자에게 알려줬다며 보복 폭행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실상 감금 상황에서 성매매까지 당하고 나중에는 직접 성폭행까지 당했다는 겁니다.

가해자들은 10대로, 미성년자였습니다. 이들은 “너 때문에 돈을 물어주게 생겼다”며 A양과 친구 B양을 협박했고, 채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성매매를 알선한 뒤 돈을 받아 챙겼습니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다음에도 여중생들의 고초가 이어졌습니다. 사건 이후, 집에 돌아온 A양은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가 가해자들과 맞닥뜨리고 맙니다. 그리고 끝난 줄 알았던 지옥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A양을 발견한 가해자들은 “(성매매로) 돈을 충분히 벌지 못했다”며, A양과 함께 있었던 친구를 데리고 가 구타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1명은 A양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 성폭행하기도 했습니다. 가족에게도 전말을 쉽게 알리지 못했던 A양은 며칠 뒤 병원에 입원했고 전치 3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병원에?

경찰이 사건을 인지한 건 처음 A양이 협박을 당한 때로부터 일주일이 넘게 지났을 때였습니다. A양의 사연을 알게 된 병원 관계자의 제보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10대 또래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보복범죄에 성범죄까지 얽힌 엄중한 사건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부터 A양은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습니다. A양은 이미 가해자들의 신원을 알려줬다며 보복을 당한 적이 있던 터라, 가해자들이 누군지, 어디서 폭행을 당했는지 등 체포를 위한 여러 정황들을 그대로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무슨 일에선지 가해자들을 ‘긴급체포’하지 않았습니다. 형사 절차에서 긴급체포는 피의자가 사형, 무기 또는 장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할 때, 증거인멸의 우려 또는 도망의 염려가 있을 경우 지방법원 판사의 체포영장을 발부받기 전에도 미리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는 수사기관의 권한입니다. 왜 사건을 인지한 즉시 가해자들을 긴급체포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경찰은 “현행범이 아니었다”며, 이들이 "긴급체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A양이 입원해 경찰서를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던 병원에 가해자들 가운데 한 명이 치료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이전에 팔을 다쳐 수술을 받았던 가해자가 팔에 박힌 철심을 빼기 위해 병원을 찾은 겁니다. 이 사실을 인지한 경찰은 그날 바로 체포영장을 신청해 다음날 오전 가해자를 체포했습니다.

물론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 병원에 있다는 걸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경찰 역시 피해자와 보호자에게 즉각 이 사실을 알리고 대책 마련에 나서, 하마터면 같은 층 병실에 입원할 뻔했던 가해자를 A양 병실 아래층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는 함께 병원에 있던 18시간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보호자와 옷을 바꿔 입으면서까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해자는 정식으로 조사를 앞둔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찰의 제재 없이 병원을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 “긴급체포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경찰은 2번의 긴급체포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 2번이라 함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처음 사건을 인지하고 신원을 특정했을 때, 그리고 그 이후 병원에 가해자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입니다.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경찰은 “긴급체포 요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단순히 SNS 망에서 연락을 주고받은 사이였기 때문에 이름을 제외하고는 확실한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두 번째 조사받는 날에야 털어놨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피해자 진술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해자의 혐의를 특정할 증거가 없어 긴급체포를 하기 쉽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상해 사실이 명백했고 가해자들의 이름과 범행 장소 등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해명은 다소 군색합니다. 수사가 되지 않았다면, 급히 수사를 해서 긴급체포를 했어야 합니다. 가해자들의 죄목이 상당한 중죄였다는 점에서 이 점은 지금도 의아한 부분입니다. “가해자들이 잡히지 않은 5일 동안 또 무슨 다른 범죄를 저질렀을지 어떻게 아냐”는 A양 보호자의 우려가 타당한 이유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비슷합니다. 경찰은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가해자의 치료받을 권리를 자의적으로 박탈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경찰은 가해자가 피해자가 있는 병원에 입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체포영장 신청을 서둘렀고, 다음날 오전에 체포해 가해자는 철심을 빼지 못한 채 경찰에 구금됐습니다. 결과로만 따지면 병원에 오자마자 체포한 것이나, 다음날 체포한 것이나 똑같았다는 말입니다.

알고 보니 해당 경찰서는 최근 비슷한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해 긴급체포를 했다가 인권위원회의 ‘권고’ 조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무리한 긴급체포을 발동해 어려움을 겼었던 터라 쉽사리 긴급체포권을 행사하기 어려웠다는 상황에 대해서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급체포가 아니라도 보강 수사를 거쳐 적어도 가해자가 병원에 들르기 전 ‘체포영장’을 신청하면 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수사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48시간의 딜레마

경찰의 말을 종합하면 ‘충분한 수사’를 위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체포 다음의 형사절차에 해당하는 ‘구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속은 말 그대로 타인을 강제로 속박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구속된 피의자라 해서 형이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수사기관에 ‘구금’ 상태로 수사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구속요건 역시 체포요건과 비슷합니다. 죄질이 중하다고 판단될 때 또는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붙들어 놓고 수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이라는 절차를 하나 더 거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피의자는 지정된 기일에 지방법원 판사 앞에서 구속 여부를 가리는 심사를 거치게 됩니다. 흔히 ‘영장실질심사’라 부르는 제돕니다.

구속은 수사기관이 수사를 확장하거나 혐의를 확정하기 위해 흔히 동원하게 되는 조치입니다. 개별 사건에 대한 법원의 첫 번째 정식 판결이기도 한 셈이라 구속 여부는 보통 ‘수사의 성과’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체포’된 피의자의 경우, 이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기한이 체포로부터 48시간 이내라는 겁니다. 그 기간 안에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으면 즉시 체포된 피의자를 석방해야 합니다. 만일 경찰 수사가 미진해 구속영장이 검찰 단계에서 반려되면 경찰은 다시 수사를 보강해 영장을 신청해야 합니다.

결국 경찰은 체포 후 48 시간 안에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하는 압박감에서 시간을 더 벌기 위해 체포시기를 늦춘 것입니다. 완벽한 수사 후에 구속영장을 신청해 구속이라는 성과를 내려했다는 것입니다.
● 구성의 모순, ‘완벽한 결말’에 대한 허상

가해 청소년들이 알선했던 여중생 성매매의 공모자들, 즉 성을 샀던 이들이 누구인지, 가해자들이 또 다른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등 수사 범위를 넓히려 했던 경찰의 의지를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겁니다. “하필 가해자가 병원을 찾을 무렵, 체포영장을 신청할 만한 근거 자료가 확보됐다”며 충분히 억울해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긴급체포를 했다가 ‘권고’ 조치를 받았던 학습효과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수사 시나리오’만 염두에 두고 미처 가해자 중 한 명이 피해자가 있는 병원을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문제는 '피해자 보호'가 제1의 원칙으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성범죄를 당연히 바로 체포할 수 있는 ‘긴급한 죄’의 성질로 보지 않았다는 점, 하다못해 병원을 옮기거나 경찰이 상주하는 등 가해-피해자의 철저한 격리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지난해 말 경찰청은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범죄피해자 보호를 위한 예산을 2억4천만 원에서 16억 원으로 대폭 확대했습니다. “범죄피해자가 심리적, 신체적 안정을 찾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서였습니다. 늘어난 예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일선 서까지 ‘피해자 보호’라는 수사의 제1원칙을 직업적 감수성의 차원으로까지 체화하는 일일 것입니다.

※ 한국여성변호사회에서 피해 여중생들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여성변호사회장 이명숙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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