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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장하성 선생의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 부쳐

[취재파일]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우리 나라의 임금 노동자는 1874만 명이다. 여기서 문제. 이 중에 월 소득 100만 원이 안 되는 노동자는 과연 몇 명일까? 2백만 명? 3백만 명? 놀라지 마시라. 국가 공식 통계를 종합해보면 무려 6백37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리 나라 전체 인구 대비로 보면 이 숫자가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임금 노동자 3명 중 1명은 월 소득이 100만 원 이하란 얘기다. 어떤가. 개별소비세를 인하하고,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하고, 임시공휴일을 지정해도 내수가 살아나지 않는 이유, 우리 나라의 내수 시장 규모가 인구 대비 턱없이 작은 이유, 경제는 성장하는데 여기 저기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게 이제 이해가 가지 않는가. 그래서 장하성 교수는 “우리 나라의 임금 문제가 상대적 배 아픔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배고픔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또 한가지. 올해 정부는 경제성장률 목표로 3.1%를 제시했다. 한국은행은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했고, 국내외 경제연구소 등은 대내외 여건이 열악해 3% 성장이 어려울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3% 성장을 하든 2%대 성장을 하든 그래서 뭐 어쩌라고? 2년 전 취재현장에서 만났던 지하철 공사 하청업체 소속의 40대 비정규직 노동자는 당시 기본급과 수당을 모두 합한 월급이 170만 원에 불과했다.

7년 전 일을 시작했을 때 150만 원이었던 월급이 7년 동안 겨우 20만 원 오른 것이다. (전년도에는 단돈 2만 원이 올랐다고 했다.) 같은 기간 우리 나라 GDP는 25% 가까이 성장했는데, 40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인상률은 13%에 그친 것이다.

GDP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이 노동자에게 성장률이 3%가 아니라 30%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손아람 작가가 망국선언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아무도 살 수 없는 높다란 탑을 쌓아올린 뒤 먼 발치에서 그 웅장한 풍채를 감상하는 것이 이 나라 경제의 목표”가 아닐진대.
 
그러니까 과거와 같은 7-8% 고성장 시대를 건설해서 낙수효과가 '짠'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고, 그럴려면 대기업의 경쟁력을 더 키워줘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제발 고이 넣어두시길. 깨몽. 꿈 깨시라. 과거의 고성장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을 뿐이다. 현재 우리 나라 경제 규모에서 3% 안팎의 성장은 결코 저성장이 아니라 ‘적정한’ 성장이다. 게다가 최근 OECD 국가들과의 성장률과 비교해보면 우리 나라 경제는 상대적으로 ‘고성장’ 중이다.
 
결국 성장률이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혜택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의 문제다. 우리 나라 가계 소득의 90% 이상은 전적으로 임금 소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 규모가 커지고 성장하면 최소한 비슷한 정도로 임금이 올라야 성장의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 경제는 ‘적정’하게 성장해왔는데, 그 과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장하성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국민소득(GNI) 중에서 가계소득의 비율은 70%에서 62%로 약 8% 감소했고, 기업소득의 비율은 17%에서 25%로 8% 증가했다. 정부 몫은 13%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가계 소득이 줄어든 만큼 정확하게 기업소득으로 이전된 것이다.” <왜 분노해야 하는가> p68-69
 
대기업으로 이전된 가계소득은 대기업의 내부유보금 형태로 수 백조 원이 쌓였다. 이는 국가 전체의 경제를 위해 임금이나 세금, 배당, 투자 등으로 노동자와 협력업체, 주주, 정부에 골고루 ‘분배’됐어야 할 몫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곰이 꿀단지 숨기듯 곳간만 채우고 있다. 정부가 야심차게(?) 도입한 기업환류세제도 곳간 문을 여는 데는 역부족이다. (물론 제도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탓이지만.)
 
그런데 대기업이 이렇게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은 대기업 자체의 경쟁력 때문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직원의 평균 임금 (9700만 원)을 100으로 놓으면, 1차 하청업체는 딱 60%다. 2차 하청업체의 평균 임금은 1차 하청업체의 60%다. 3차 하청업체는 2차 하청업체의 60%다. (희한하게도 60%의 법칙이 존재한다.)

결국 3차 하청업체 직원의 평균 임금은 현대자동차 직원 평균의 24%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대자동차가 만들어내는 전체 부가가치에 있어 3차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노력과 기여가 정확히 24%에 해당한다는 경제학적, 경영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단가 낮추기 등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 남용 외에는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게 장하성 교수의 설명이다. (우월적 지위 남용, 즉 갑질 자체가 바로 경쟁력이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말 없다.)
 
대기업들은 자사 남성 정규직원들에게 임금노동자 상위 10%에 해당하는 고 임금을 지급하고도 수백 조 원에 달하는 내부유보금을 쌓을 만큼 이익을 내고 있다. 해외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제품의 판매 단가가 애플 등에 비교해 극히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기업의 초과이익은 자체 경쟁력 보다는 하청업체와 하청업체의 노동자, 수많은 비정규직, 파견직의 임금 즉 가계 소득과 정부에 내야 할 세금 감면 등을 통해 (공정하지 못하게) 이전 받은 부분이 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업의 존립 목적은 이윤을 내는 것이 아닌가. 기업이 이기심을 부리고 이익을 많이 내는 게 왜 나쁜가!” 우리는 기업 활동의 목적을 이익의 최대화라고 배워왔다. 그리고 그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장하성 교수는 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고 제안한다.

기업이 이익을 최대화 하려면 매출을 올린 뒤, 노동자의 임금과 납품업체/협력업체에 줘야 할 대금, 주주에게 나눠주는 배당, 정부에 줘야 할 세금, 즉 분배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야 이익이 많이 남는다. 결국 이익의 최대화는 분배의 최소화인 것이다. 이익의 최대화가 아닌 분배의 최소화. 자, 이제 어떤 느낌인가.
 
여성학 강사 정희진의 말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는 언어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기업이 자신만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이익의 최대화라고 표현할 때 “강자의 언설은 보편성으로 인식되지만 약자의 주장은 ‘불평불만’으로 간주된다. 언어의 세계에 중립은 없다.”

그렇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해달라고, 임금을 더 달라고, 최저임금을 올려달라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익의 최대화’란 표현 앞에서 불평불만쯤으로 간주된다. 영화 <내부자들>의 조국일보 이강희 논설위원도 정확히 갈파한다. “말은 곧 힘이고 권력이다.”
 
물론 대기업이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우리 대기업들의 모습은 최소한 공정하지는 못하다. 왜냐고? 기업은 특히 대기업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이, 그것도 한 나라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다양한 공적 자산을 필요로 한다.

의무교육을 통해 길러진 인적 자원과 도로, 물류, 전기 등 기간 인프라와 각종 지원제도와 법률의 보호 없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나홀로 대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이나 스티브 잡스가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지언정 물적, 인적, 제도적 인프라가 전무한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삼성이나 애플 같은 기업을 일궈낼 수 있었을 것인가.
 
사회적 자산을 토대로 성장한 대기업에게는 당연히 사회적인 책임과 역할이 뒤따른다. 그리고 장하성 선생은 “기업의 역할은 ‘분배’”라고 역설한다. 당연한 말이다. 기업은 경제의 3주체 중 하나다. 경제 주체로서 가계의 역할이 노동력 제공과 소비라면 정부의 역할은 인프라 구축과 재분배다.

국가와 가계의 지원으로 수익을 내는 기업의 역할은 당연히 생산된 사회적 부를 적절하게 분배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업은 일자리 창출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측면이 있다. 전혀 책임을 안 지고 있다는 게 아니다. ‘충분히’ 지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정부와 정치권은 책임을 충분히 지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 가계 소득의 90% 이상은 임금 소득이다. 상위 10%의 극히 일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충분한 임금이 주어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불충분한 분배로 인해 현재 우리 나라의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
장하성 교수
사적 이익의 추구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경우에는 사적 이익과 재산에 대한 규제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지금 대기업의 지나친 이익 최대화에 따른 소득불평등이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지점을 넘어서고 있다는 게 장하성 교수의 진단이다.

자본주의는 사적 이익의 추구가 공동체의 최대이익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경제 체제다.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시장이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사적 이익의 추구가 공동체의 이익을 해치고 시장을 교란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뜻이 된다.  

돈이 돌지 않고 한쪽에만 수북히 쌓여 내수가 침체되고, 성장을 저해하며, 경제의 활력을 잡아먹고 있다. 이것을 과연 미래지향적인 시장 경제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와 정치는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장하성 교수가 던지는 또 하나의 인사이트는 정부 주도의 재분배, 즉 복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틀을 근본적으로 깨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복지 논쟁은 GDP 대비 정부의 복지비 예산을 어디까지 늘릴 것인가, 한정된 복지재원을 어디에 먼저 투입할 것인가 하는 미시적인 부분에 머무르고 있었다.

장하성 교수는 여기서 “가계소득 뿐 아니라 정부의 소득 즉 정부 예산 역시 GDP 성장률 만큼도 늘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다. 가계 소득은 기업 소득으로 이전되고 있다. 가계 소득이 줄어든 만큼 소득세 세원도 줄어든다. 그렇다면 법인세라도 올려야 할 텐데 정부는 기업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당연히 정부는 가난해진다.

실질 가치 기준으로 점차 쪼그라드는 정부 예산을 전부 다 복지 분야에 쏟아 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해 사회 전체의 부가 공정하게 분배돼 파이를 늘리지 않는 한 정부의 복지 지출 확대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재분배인 복지로는 임금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부의 불평등을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실제로 우리 나라 복지 지출의 재분배 효과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매우 낮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기성세대이자 기득권에 접어든 486과 포삼세대(이른바 X세대를 위시한 90년대 학번을 지칭하는 청년세대의 표현이라고 한다. Post-386의 준말로 보인다)가 원천적인 분배, 즉 임금과 고용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정부를 매개로 한 재분배의 영역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것 역시 공정하지 못하다.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는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노동자간 양보와 연대도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정규직 중간 간부로서 자신 명의의 집을 소유하고 중형차를 굴리며, 자식에게 일정 수준의 교육을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임금에는 본인의 노력과 능력도 작용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를 통한 이익 최대화의 수혜를 받은 측면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연대와 양보에 대한 고민 없이 ‘복지 만병통치론’, ‘복지 확대론’만 되뇌이는 것은 이범 민주정책연구소장의 말처럼 “486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나 자신 역시 이런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포삼세대 40대 남성 정규직이며, 원천적 분배 보다는 재분배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는 점을 고백한다.) 
 
장하성 교수는 이 책의 “최초 집필동기가 불평등 분석이 아니라 청년세대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해달라는 기대와 소망”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하성 교수의 바람과 달리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불평등 분석에 있다. 장하성 교수는 우리가 직관적으로만 알거나 느끼고 있었던 사실을 방대한 정부 공식 통계와 이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토대로 지루하리만큼 치밀하고 꼼꼼하게 논증한다.
주의/주장이 아니라 통계와 분석으로 하여금 우리가 거쳐가고 있는 현재의 민낯이 자연스럽게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분노해야 하는가>의 1부와 2부는 우리의 적나라한 일상을 꿰고 뚫는 사유의 ‘죽창’이다. 이 죽창으로 어디를 어떻게 찔러 균열을 낼 것인지, 혹은 죽창을 들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자의 몫이다.

결국 <왜 분노해야 하는가>는 안암동 모피어스 장하성 선생이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 시대 모든 잠재적 네오들에게 건네는 빨간 약이다. 빨간 약과 파란 약 가운데 무엇을 먹을 것인가. 자,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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